차남호 2025. 6. 9. 11:05

어둠이 깃든 초여름 밤, 시골 마을은 꽤 시끄러운 편이다. 울음인지, 노래인지 개구리 떼창으로 요동친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그 입체음향은 그저 소란스럽지만은 않은 울림이 있다. 그 사이를 뚫고 컹컹 울리는 동네 개 짖는 소리. 그것만으로도 아련한 향수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굴뚝에 밥 짓는 연기 피어오르는 풍경, 노는 데 넋이 나간 아이들 부르는 엄마 목소리는 이제 사라졌지만. 그리고 끊일 듯 이어지는 애절한 소쩍새 울음. 여름밤은 그렇게 깊어간다.

 

저 멀리 그리고 가까이 산허리는 콩고물을 뿌려놓은 듯 부연 밤꽃으로 뭉개졌다. 그러고 보니 유월로 접어들었다. 상추는 꽃대를 올리고, 보리가 익어가는 무렵. 이제 이 고장은 이모작 양파와 마늘 캘 때로 이 시절을 떠올린다. 하지만 유월은 뭐니 뭐니 해도 모내기다.

 

안 그래도 지난 주말 여럿이 함께 동네 모를 심었다. 고산향교육공동체가 마련한 <풍년기원 단오한마당>이라 할 손모내기. 고산의 두 초등학교 학생과 학부모 1백 여명이 참여했고, 이번에도 고산권벼농사두레가 행사를 이끌었다. 못줄 뒤로 늘어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처음엔 꼼지락꼼지락 굼뜨던 아이들도 열 줄 남짓 심다 보면 이력이 붙게 돼 있다. 맨발바닥에 닿는 진창의 미끈한 느낌이 낯설기도 하고, 더러 다리가 꼬여 발라당 넘어지기도 하지만 한 시간 남짓 모내기를 마치고 나면 모두가 뿌듯한 표정이다.

 

이건 그 옛날, 동네마다 모내기 두레를 짜서 이른 아침부터 저물녘까지 보름 남짓 바쁘게 돌아가던 시절의 손모내기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체험일 뿐 현실이 아닌 게다. 이 시대의 실화는 이앙기 한 대가 그 숱한 일손을 대신하는 기계 모내기다.

 

그 모내기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십 년 넘게 벼농사 이력이 쌓였거늘 막상 모내기를 앞두고도 심신이 천근만근 무겁다. 어차피 해야 할 일 미룰 대로 미루다가 코앞에 닥치고야 몸을 움직이니 참으로 병통이 아닐 수 없다. 논둑에 우거진 풀 애진작에 쳐주었어야 하는데 차일피일 미뤄오다가 어제서야 예초기를 점검하고 시운전을 했다.

 

이력이 문제가 아니라 심성의 문제일까. 어쩐 일인지 마음을 내기가 쉽지 않다. 이래저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올해는 특히 어렵겠거니 해두자.

 

어쨌거나 지금은 모내기를 위해 논배미를 삶아야 하는 시간. 한가득 물을 가둬 흙을 바수고 써레질을 하는 일이다. 물론 트랙터라는 기계로 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비가 내린 지 오랜 터라 물 구하기가 쉽지 않는 논배미가 더러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어찌어찌해서라도 물을 가둬 모낼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지난해는 저수지 둑이 터져 물이 바닥난 상태에서도 결국 모내기를 하지 않았던가.

 

사실 소규모 벼농사라는 게 농가경제 측면에서 그 가치를 찾기가 힘든 실정이다. 그렇다면 무엇하러 유기농 벼농사를 고집하는 것인지 근본적인 물음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건강한 먹거리, 식량주권, 생태보전... 그 답은 여전히 그대로다. 그렇다면 하는 짓이 달라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아가 시간이 흘러도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줄지 않고 있다면 더더욱 기운을 잃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달포 전에 모판을 앉힌 못자리에는 볏모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이번 주말 벼농사두레는 다시 모인다. 못자리에서 논배미로! 모내기할 모판을 나르기 위해. 월간 <완두콩> 2025년 6월호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