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폭헌 야그(1)-못자리

2013. 5. 22. 22:50카테고리 없음

나한테 이런 '불행'이 닥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못자리가 말이다.

내 자랑은 아니지만 지난해 못자리는 말그대로 '환상'이었다. 동네 모정 바로 앞에 못자리가 자리한 지라 어르신들의 입방아에 오를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가 너무 잘 됐다"는 품평을 얻었던 것이다. 심지어 "모가 월매나 이쁜지 갖고 놀고 싶을 정도"라는 얘기까지 있었단다. '나락농사는 모농사가 절반'이라는데, 그것도 초짜농사꾼의 솜씨였으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나. 아래 사진에서 보듯, 푸른 융단처럼 잘 가꿔놓은 잔디구장을 떠올릴 만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독이 되었다.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하루에도 아침, 저녁 두 번씩 못자리에 들러 물관리를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건성이었다. 정확한 물높이를 확인하고, 모 상태를 확인했어야 하는데 지난해의 '영광'에 취한 나머지 두덕상태가 높았음을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결국 열흘 남짓 물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열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그 동안에는 못자리가 부직포에 덮여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부직포를 떠들고 정확히 확인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열흘이 지나 비가 내린 뒤 빗물에 젖어 반투명 상태가 된 부직포에 어른대는 모 상태를 보고서야 화들짝 놀라고 만 것이다.

이건 아니다 싶어서 '땅기운벼작목반' 반장이면서 이 동네에서는 친환경 벼농사의 '권위자'인 광수 씨와 함께 못자리를 둘러봤다. 부직포를 걷고 보니 상태가 심각하다. 듬성듬성 싹이 올라오지 못한 모판이 적지 않다. 광수 씨 말로는 수분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처음 고개를 내민 싹이 타버렸다는 것. 씨나락이 곯아버린 건 아니니 일단 물을 충분히 대고서 경과를 보자고 했다. '권위자'가 내린 처방이니 토를 달 것도 없는 일이고... 그게 지난 일요일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경과를 살펴본 광수 씨가 아침 일찍 문을 두드렸다.

"안 되겄어. 다른 조치가 필요허겄고만"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서둘러 못자리판으로 갔다. 아래 왼쪽 사진처럼 상태가 괜찮은 모판도 있지만, 태반이 오른쪽처럼 심각하다. 엊그제 응급조치로 그나마 싹이 올라오긴 하는데, 상태가 믿고 기다릴 만큼 좋지가 않다는 것이다. 나중에 낭패를 볼 수 있으니 지금이라도 신통찮은 모판 만큼이라도 새로 씨나락을 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못자리를 함께 만든 김 장로와 운영 씨한테 전화를 해 대책을 세우자고 전했다. 곧장 달려온 이들과 함께 다시 못자리 상태를 점검하고, 대책을 의논한 결과 광수 씨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막막했지만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점이 그나마 위로가 되는 모양이다. 결정이 나자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필요한 조치를 하나씩 확인해나갔다. 우선, 열탕소독기를 찾아야 한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열탕소독기가 양야리 장광호 씨 창고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작업은 지난번처럼 밤실교회에서 하기로 하고 곧장 운영 씨 트럭을 몰아 열탕소독기를 실어왔다. 다음으로 염수선에 필요한 소금과 열탕 보일러를 돌릴 등유를 구해오고... 3주 전에 했던 공정(못자리 만들기-또 한 고비를 넘다 )이  그대로 재현됐다.

 

 

번개불에 콩볶 듯, 두 어 시간만에 씨나락을 담궜다. 지난번과 달라진 것은 저 열탕소독기에 씨나락을 넣어 싹을 틔우는 것이다. 소독기가 발아기 겸용이다. 일주일 동안 흐르는 물에 씨나락을 담가 둘 여유가 없는 탓이다.

오늘 새로 담근 모가 되었든, 기존 못자리에서 뒤늦게 올라올 모가 되었든 모내기는 예정보다 일주일에서 열흘 남짓 늦춰지게 됐다. 이것도 '좋은 경험' 했다고, 허허 웃고 넘어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