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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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슬픔의 가을
11월하고도 중순, 산야가 온통 단풍으로 물들었어야 마땅하거늘. 지금 창밖에 비친 풍경은 여전히 푸른 빛이다. 벽을 타고 오른 담쟁이만 발그레하게 물이 들었을 뿐. 여느 해 같으면 ‘마지막 잎새’까지 다 떨어져 덩굴만 앙상할 시점이다. 이 어인 조화인지. 하지만 답은 그리 어렵지 않게 풀린다. 올해는 여름이 늦게까지 이어졌으니 단풍 또한 그만큼 늦어지는 게 당연한 자연의 섭리인 게지. 추석이 지나도록 섭씨 35도를 넘나드는 폭염이 지속됐던 기억이 다시 살아난다. 단풍이 늦어서가 아니라 기후변화로 혼란스러워진 자연현상이 심란한 것이다. 계절을 착각해 봄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오니 말이다. 입동이 며칠 전이었다. 초겨울에 접어들 시점이지만 아직도 화창한 가을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기후위기 걱정만..
2024.11.15 -
기후정의! 강남대로를 가다
다시 서울 가는 전세버스에 몸을 실었다. 지난해에 이어 일 년 만이다. 기후정의행진> 완주지역 참가단 85명의 한 사람으로. 지난해보다 참가자가 많아 버스도 두 대에서 세 대로 늘었다고 한다. 지난 2019년 첫발을 뗀 기후정의행진은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전국의 시민이 한 곳에 모여 성장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를 혁파하고 기후불평등 해소와 거대한 전환의 흐름을 만들려는 자발적 운동이다. 올해는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는 슬로건을 내세워 서울 강남대로에서 열렸다. 3만을 헤아리는 이들이 저마다 자신의 절박한 호소를 쏟아냈다. 본대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으리으리한 고층빌딩이 늘어선 강남대로-테헤란로를 행진하며, 그 심각성에 견주어 무심하고, 무기력한 기후위기 대응에 각성을 호소하고, 급진적인 체제-정책전..
2024.09.10 -
엎친 데 덮친 그 다음
한 줄기 소나기가 시원하게 쏟아지더니 따갑게 내리쬐던 땡볕이 잠시 누그러졌다. 지난 한 주일 어간의 날씨가 이 모양으로 이어지고 있다. 열대우림 지역에서 나타나는 스콜(squall)과 비슷한 현상이다. 아니 그냥 스콜이라 해도 틀림이 없겠다. 오랜 가뭄 뒤에 늦게 찾아온 장마전선이 여느 해보다 오래도록 한반도 상공에 머물고 있다고 하는데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이 땅의 기후가 이미 아열대로 바뀌었다는 것이 정설이고 보면 이 시원한 소나기가 그저 반갑지만은 않다. 가뭄이 오래 이어지던 지난 6월 하순, 어쩔 수 없이 가뭄>이라는 노래가 입안을 맴돌았었다. (농촌별곡> 7월호) 어서 빨리 장마가 찾아와 이 가뭄을 씻어주기를 학수고대하던 나날. 그런데 “이 가뭄 언제나 끝나 무슨 장마 또 지려나” 더..
2024.07.29 -
김매기, 폭폭한 노릇
김매기 엿새째. 어느 정도 짐작은 했더라만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 김매기로 말하자면 벼농사 짓는 농사꾼의 숙명이다. 가뭄이 극심했던 7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뒤적여보니 꼬박 6일, 실제 작업은 22시간을 매달렸노라 그해 기록은 말하고 있다. 올해는 그 기록마저 넘어서고 있지 않은가. 안밤실 네 마지기 배미가 문제다. 오늘 아침나절까지 20시간 가까이 김을 매고 있지만 여적 거기를 못 벗어나고 있다. 다른 배미에는 거의 풀이 올라오지 않았는데 유독 이곳만 말썽이다. 여기 물을 대주는 분토 저수지 수문이 지난해 장마에 무너지면서 제방공사가 진행 중인 까닭이다. 올해 말에 가서야 공사가 끝났다고 한다.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공사를 마칠 수 없었는지 ‘늑장행정’에 분통이 터질 노릇..
2024.07.08 -
모판나르기 또는 난장 파티
모내기가 시작됐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그 바쁜 와중에 틈을 내어 이 글을 쓰고 있다. 모농사가 반 농사요, 모내기가 끝나면 벼농사 8할은 마친 셈이 된다. 하여 벼농사두레 공동작업(두렛일)은 못자리 만들기와 모판 나르기가 그 절정이라 할 수 있다. 두레의 아름다운 가치를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일이 가장 고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달포 전 조성한 물못자리에 앉힌 볏모는 그 사이 별탈 없이 잘 자라 주었다. 모내기는 다 자란 이 모들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논배미에 옮겨 심는 공정이다. 그러자면 모를 잘 심을 수 있도록 ‘본답’을 꾸며야 하는데 이를 ‘논배미 만들기’라 한다. 그 과정이 그리 녹록지가 않다. 먼저 우거진 풀을 베어내고 물을 잘 가둘 수 있도록 논둑을 손봐야 한다. 요즘은 ‘..
2024.06.12 -
" '두레'란 게 뭐여? "
주뻐야소.낮에는 뻐꾸기, 밤에는 소쩍새라. ‘뻐꾹 뻐꾹 봄이가네~ 뻐꾹 뻐꾹 여름 오네~’ 계절이 바뀌는 소리. “솥/적/다”고 풍년을 예고하는 애절한 울음. 어쨌거나 벼농사가 시작됐다는 신호 되시겠다. 안 그래도 우리는 5월 첫머리를 모농사로 수놓았다. 볍씨를 담가 싹을 틔워 파종한 모판을 못자리에 앉히는 한 주 남짓한 두렛일이 끝난 것이다. 뜻하지 않은 어려움으로 애를 먹기도 했지만 마무리는 아름다웠다. 못자리에는 지금 앙증맞은 볏모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볍씨 담그는 공정부터 문제가 생겼다. 소금물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염수선 작업은 가뿐했다. 처음 해보는 새내기 일꾼들에게는 날계란을 띄워 염도를 맞추는 과정부터가 신기한 경험이었을 터. 막걸리 잔으로 목을 추겨가며 여유잡고 그 다음 열탕소독을..
2024.05.13 -
꽃비 나리고 새잎이 돋으면
봄인가 했더니 벌써 꽃잔치가 끝나가고 있다. 매화는 진작에 지어 손톱 만한 열매가 맺었고, 개나리를 지나 벚꽃과 배꽃 잎이 허공중에 꽃비로 흩날린다. 지난 며칠 화사한 빛으로 간드러지게 피어났던 복사꽃도 조금씩 제빛을 잃어간다. 봄날은 이렇듯 허망하게 흘러가는 겐가. 눈부신 꽃잎을 떨군 들녘은 이제 연두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면 꽃잎 무리가 솜사탕처럼, 뭉게구름처럼 점점이 박혀 있던 산자락도 차츰 푸른 기운이 짙어간다. 좀 서글프고 야속도 한 시절이 흐른다. 그도 잠시, 아련한 춘심을 추스르고 보면 이게 다 농사철이 되었다는 표식임을 깨닫는다. 농한기, 이제 좋은 시절은 다 갔다. 농사철이 다가오면 먼저 마음을 다잡고, 슬슬 몸도 풀어준다. 걱정이 앞서다가도 막상 농사에 접어든다 싶으면 맘이 ..
2024.04.15 -
봄, 벼농사를 지어보자
아직 꽃샘추위가 더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만 들녘엔 봄기운이 뚜렷하다. 뜰앞의 매화가 첫 망울을 터뜨린 게 경칩이던 며칠 전이다. 같은 고장이라도 자리에 따라 또는 품종에 따라 꽃피는 시기가 조금씩 다르긴 하다. 울안의 매화는 늘 그 자리를 지켜왔으니 날씨의 흐름이 지난해와 엇비슷함을 알겠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러저러하게 통하는 것일까. 바로 그날 동네 단톡방에 ‘화암사 나들이’를 알리는 벙개가 떴다. 느긋한 시절이고, 마침 달리 볼일도 없어 길을 나섰다. 조금은 쌀쌀한 날씨라 단출한 나들이가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뜻밖에도 여섯이나 모였다. 절로 가는 들머리에는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얼마 전 내린 비 때문인지 계곡물은 유량이 제법 되었고, 곳곳에 뭉게뭉게 개구리 앞이 실려 올챙이로 깨어나려는 참이다. 샛..
2024.03.12 -
유장한 세월
겨르로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고산권벼농사두레 대표라는, 나름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지 달포 남짓. 때마침 농한기를 만나 바쁠 일도 없으니 그야말로 유유자적, 하루하루가 느긋하다. 불현듯 ‘이리 태평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밀려들기도 한다. 왜 안 그렇겠나. 여느 해 같으면 준비하고 진행하느라 바삐 움직일 때 아니던가. 몇 차례 기획 회의에, 강사 섭외에 눈코 뜰 새가 없었을 즈음이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집행부가 올해는 강좌를 쉬어가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설령 지속하기로 방향을 정했더라도 거기 내가 끼어들 일은 없다. 농한기강좌를 열지 않는 대신 조촐히 정월대보름 잔치를 벌이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그 준비작업 또한 내가 맡을 몫은 없다. 그런데도 문득문득 조바심이 이는 건 그동안 몸에 밴 ‘관성..
2024.02.16 -
새 출발, 벼두레를 위하여
지난 1월13일 고산권벼농사두레 2024년 정기총회가 열렸다. 정기총회는 한 해 활동을 갈무리하고 새로운 활동계획을 세우는 연례행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올해 벼두레 정기총회는 여느 해와 달리 무척 뜻깊은 마당을 이루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집행부가 탄생했다. 지난 6년 동안 3연임으로 대표를 맡아온 내가 회원의 한 사람으로 물러선 것을 비롯해 집행체계가 새롭게 물갈이 되었다. 나름으로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가 열린 셈이다. 돌이켜보면 벼두레의 태동은 9년 전, 2014년 12월 2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포트모 시스템’으로 유기농 벼농사를 짓고 있거나 뜻을 품고 있던 예닐곱이 모였더랬다. 게 중에는 나처럼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짓는 이와 시골 사는 맛을 더하려 농사를 짓는 이(우스개 삼아 ..
2024.01.14 -
벼두레 @ 겨울바다
봄비 같은 겨울비가 내린다. 바깥 날씨가 포근하기까지 하다. 안 그래도 겨울잠 자던 개구리가 깨어나 알을 낳았다는 둥, 어디에서는 매화가 꽃을 피웠다는 둥 어리둥절한 소식이 전해지던 터다. 이렇게 지구가 더워지다가 결국은 종말에 이르겠거니 생각하면 가슴이 못내 서늘해진다. 엊그제도 그랬다. 변산반도 모항 해변, 벼농사두레 회원엠티를 다녀왔다. 허름한 옷차림으로 백사장에서 활개를 치다가 야외테이블에서 음료와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씻어낼 만큼 날씨가 푹했다. 다들 기후위기를 걱정하던 끝에 누군가 “그래도 엠티 날짜 하나는 기막히게 잘 잡았다”고 하자 너나없이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엠티라는 게 이름 그대로 회원 사이의 친목을 다지면서도 주요현안을 깊이 있게 의논하는 자리 아니던가. ..
2023.12.12 -
햅쌀로 지은 '광란의 밥'
이틀 내리 세찬 바람이 불었다. 굵은 빗줄기까지 함께 내리쳤다. 그 바람에 비닐하우스 위에 똬리를 튼 등나무 덩굴이 훌러덩 벗겨져 거꾸로 처박혔다. 담벼락을 타고 오른 담쟁이, 얼마 남지 않았던 이파리마저 죄다 떨어져 앙상하게 덩굴만 남았다. 산과 들녘의 풍경도 사뭇 바뀌었다. 뒷산 소나무는 솔가리를 우수수 쏟아내고 활엽수는 저마다 마른 잎을 떨궈 오솔길은 다시 바스락거리기 시작했다. 비바람 그치고 나니 겨울 초입이다. 최저기온이 영하권으로 뚝 떨어지는 바람에 보일러에 서둘러 난방유를 채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앞집 지붕에 내린 허연 된서리가 맨 먼저 들어온다. 호박잎이 눅어 오그라진 지는 벌써 며칠 되었고, 새빨간 꽃을 꼿꼿이 세웠던 백일홍도 칙칙하게 빛이 바랬다. 그래도 김장배추는 끄떡없다. 고라니 ..
2023.11.13 -
가을 환상곡
마침내 가을이다. 날씨라는 게 시나브로 바뀌는지라 몸은 이미 이 새로운 계절에 길이 들었지만 지난 여름은 무척 더웠더랬다. 덥지 않은 여름이 어디 있으랴만 되돌아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굳이 뒤를 돌아 무더위를 불러오는 까닭은 찬 바람이 불어도 이 지구는 계속 뜨거워지고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아무튼 가을이다. 가을은 하늘이다. 올해는 하늘빛이 여느 해보다 눈부시진 않지만 그래도 높고 파랗긴 매한가지. 하도 맑아서 손을 높이 벋어 손가락으로 살짝 찍으면 동그란 물결이 번져갈 것만 같다. 뭉게구름이라도 하나 둘 둥둥 떠 있으면 그것으로 가을 정취는 완성. 그 하늘 아래로는 황금빛 물결이다. 바로 이맘때, 열흘 남짓만 반짝 누릴 수 있는 눈부신 빛깔. 저 파란 하늘과 황금빛 들녘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
2023.10.16 -
잔치 인생
잔치는 끝났다. 비봉 돼지농장 완전해결 축하잔지.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3백 명을 웃도는 주민과 손님이 실내 게이트볼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비봉면 풍물패가 흥겨운 가락으로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고, 그 동안의 경과를 보고하고 소회를 나누는 간략한 의식에 이어 잔치음식을 나눴다. 두어 시간의 짧은 마당이었지만 준비하는 데는 십 수명이 꼬박 한 달을 매달려야 했다. 덕분에 별다른 말썽 없이 뜨거운 분위기에서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를 표제를 단 경과보고서를 발간해 돼지농장 재가동을 막아낸 그 지난한 과정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 뿌듯하다. 이리하여 이지반사(이지바이오 돼지농장 재가동을 반대하는 완주사람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 자리를 빌어 이 큰 잔치를 준비하느라 애써준 이지반사 집행위원..
2023.09.13 -
견뎌낸 자의 '논둑길 산책'
마음을 졸이게 했던 제6호 태풍 ‘카눈’이 이 고장을 스쳐 지나갔다. 느린 속도로 한반도 내륙을 관통해 내일쯤 소멸될 거란 소식이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큰 피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다행이다. 이번 태풍이 아니라도 이번 여름은 ‘미쳐 날뛰는’ 극한기후에 치여 온통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극한폭우를 동반한 장마가 한 달 가까이 반도를 할퀴어 커다란 생채기를 남겼더랬다. 장마가 끝나자 이번에는 연일 35도를 넘나드는 극한폭염이 보름 가까이 이어졌다. 날이면 날마다, 아침나절부터 푹푹 쪄대니 당최 견딜 재간이 없었다. 태풍이 몰고 온 빗줄기가 열기를 가라앉혀준 덕분에 그나마 한숨을 돌리고 있다. 마침 입춘도 지났고 하니 그 여세를 몰아 무더위가 한풀 꺾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실로 일상이 멈춰버린..
2023.08.11 -
“돼지와 함께 잔치를”
비봉 돼지농장 재가동을 둘러싸고 지역주민과 양돈업체 사이에 벌어졌던 분쟁이 최종 타결되었다. 축산재벌 계열사 부여육종이 휴면농장을 사들인 2015년 5월 이후 펼쳐진 이지반사(이지바이오 돼지농장 재가동을 반대하는 완주사람들)의 활동이 마침내 승리로 끝을 맺은 것이다. 어언 8년 세월이다. 완주군과 부여육종은 지난 6월16일 매매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농장부지는 완주군 소유가 되었고 양돈장 재가동 여지는 사라졌다. 부여육종은 곧이어 대법원에 올라 있던 ‘가축사육업 불허가 처분 취소 소송’의 상고를 취하함으로써 완주군(주민)이 승소한 1, 2심 판결이 최종 확정됐다. 이로써 농장 재가동을 둘러싼 행정, 사법절차는 지역주민들이 바라던 대로 마무리됐다. 그리하여 며칠 전 열린 이지반사 대표자회의에서는 오는 9월2일..
2023.07.19 -
'폭폭한' 모내기철
눈을 들어 산허리를 둘러보면 듬성듬성 콩고물을 뿌려놓은 듯 뭉게구름이 떠 있다. 밤꽃이다. 숱한 시인들이 ‘밤꽃 피는 6월’을 노래했지. 결코 예쁜 꽃은 아니나 저마다 사연을 담은 노래. 하지만 벼농사를 짓는 이 고장 농부들에게 6월초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만 하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모내기 철인 까닭이다. 사실 이 글 쓸 시간을 챙긴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모를 내는 일 자체도 큰일이긴 하다. 온 마을이 모내기 두레를 짜 새벽부터 저물녘까지 매달리던 시절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이앙기를 쓰는 요즘도 우리 ‘고산권벼농사두레’의 경우 꼬박 네댓새가 걸린다. 물론 이앙기를 모는 일이 녹록지는 않지만 힘을 쓰는 건 결국 기계이니 고단함으로 치자면 준비작업이 훨씬 더하다. 먼저 예초기를 돌려..
2023.06.13 -
꿈만 같아
지나오니 꿈만 같다. 초반 모농사 공정을 무사히 마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올해 벼농사는 그 어느 해보다 마음을 졸이면서 시작했고, 내내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노심초사의 나날이었다. 지난해 모농사를 망치고 두 번 일을 해야 했던 기억 탓이다. 해오던 대로 볍씨를 걸러 냉수침종을 거쳐 못자리에 앉혔지만 끝내 싹을 틔우지 못했던 악몽 말이다. 설마 같은 실패를 되풀이할까 싶기도 했지만 그 트라우마가 워낙 깊었던 모양이다. ‘고산땅기운작목반’에서도 지난해까지는 열탕소독을 거친 볍씨를 공급해왔으나 처리 과정에서 과열을 우려한 나머지 올해는 소독작업을 각 농가에 맡겼다. 이에 따라 볍씨 담그기에서 열탕소독 공정이 늘어난 셈이 됐다. 그 작업이야 섭씨 60도에 물에 10분 동안 자맥질하면 되니 그리 부담되는 ..
2023.05.15 -
심란한 시절
이런 봄이 또 있었던가? 개나리, 벚꽃, 명자, 복사꽃, 배꽃... 자연의 섭리를 따라 차례로 망울을 터뜨려야 할 봄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났다. 울안은 울긋불긋한 꽃 물결로 가득하여 그야말로 꽃 대궐을 차렸다. 느닷없이 펼쳐진 이 황홀경에 눈이 부시지만, 한편으로는 뒤죽박죽 흐트러진 개화의 질서가 기후변화에서 비롯됐다는 사실 앞에 가슴이 철렁한다. 아무튼 봄꽃 잔치는 보름도 지나지 않아 막을 내렸다. 이삼일 내리 쏟아진 빗줄기를 따라 꽃잎을 떨구었다. 바닥을 덮은 꽃잎은 바람 따라 흩날리고, 꽃잎 떠난 가지에는 연둣빛 새순이 돋았다. 봄날이 이렇듯 허망하게 흘러가도 되는 건가. 어쨌거나 꽃 지고 새순 돋으면 어쩔 수 없이 벼농사가 코앞이다. 안 그래도 지난 주말, 벼농사두레가 ‘경작설명회’를 열었다. 벼농..
2023.04.13 -
몹시 어수선한 봄
어쩔 수 없는 봄이다. 얼음이 스르르 녹는다는 우수가 보름 전이었다. 그 즈음에 불명산 화암사 들머리에 복수초(얼음새꽃)가 하나 둘 샛노란 꽃송이를 피워올렸댔다. 그러더니 엊그제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에는 뜰앞의 매화가 첫 꽃망울을 떠뜨렸다. 그러니 이제 누가 뭐래도 봄인 게지. 봄은 이렇듯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법이다. 하여 농한기도 그럭저럭 막바지로 치닫는 셈이다. 한 때는 눈 앞에 펼쳐진 이 ‘무한의 자유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쏘다녔더랬다. 어느 해부턴가는 그것도 심드렁해지고 동안거에 든 수도승처럼 두문불출 스스로를 울안에 가둬두고 있다. 그렇게 세상을 관조하고, 삶의 근원을 찾아 궁구하는 시절. 그러다 불현듯 마주한 봄은 그야말로 생명의 약동, 목숨붙이들이 벌이는 향연이다. 사람들도..
2023.03.07 -
매화는 물 오르고
2월로 접어드니 날씨가 확 달라졌다. 아랫녘에서는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설마 하는 마음에 바깥뜰에 심은 매화를 살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꽃망울이 부풀어 있지 않은가. 개화 등고선은 조금씩 북상하게 돼 있으니 우리 동네도 머잖아 매화를 영접하게 되겠지. 꽃망울만큼이나 마음도 부풀어 오른다. 안 그래도 뒷산을 오르자면 두꺼운 방한복과 바지가 거추장스럽던 차다. 한 시간 남짓 산을 타다 보면 막바지에는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는데, 이제는 줄줄 흐를 정도가 되었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도 한결 부드럽다. 이 모두가 봄이 다가오는 조짐인게지. 그러나 지난겨울은 무척 추웠더랬다. 그냥 추위도 아니고, 강추위도 넘어 ‘극강한파’라는 용어가 입길에 오르내렸다. 알고 보면 이 또한 기후위기, 지..
2023.02.10 -
'목적' 없이 살아볼까
계묘년, 토끼해가 밝았다. 토끼띠인 나로서는 환갑이 되는 해인데 그런 탓인지 새해를 맞는 심경이 좀 복잡하다. 어쩌면 은근히 ‘환갑잔치’를 고대하는 부류도 있을지 모르겠다만 ‘환갑’이란 말에서 묻어나는 느낌은 어쩔 수 없이 후줄근하다. 하지만 요샛말로 ‘백세시대’라 치면 이제야 중년에 접어드는 셈이니 기죽을 까닭이 없지 싶기도 하다. 세상 분위기를 보면 나이를 들먹일 나이가 아닌 게 맞는 듯하다. 그렇다고 심신이 회춘하는 건 아니니 한 해를 구상하면서도 몸 부리는 일은 애써 꺼리게 된다. 올해는 그 새는 하지 않던 짓, 새 다이어리에 한 해 계획을 적어보았다. 앞으로 해야 할 일, 하고픈 일을 죽 늘어놓는 식이었다. 역시나 뜨겁게 무엇인가를 좇고 싶은 생각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세상의 흐름에 맡..
2023.01.08 -
엠티 @ 겨울바다
“요즘 세상, 이래저래 어지럽고 뒤숭숭해서 우리네 마음도 보통 심란하지가 않지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 벼농사두레 겨울 엠티(수련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주변 정황으로 보자면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부터도 그랬습니다. 마음이 심란해 주저되기부터 하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일단 떠나보자. 서천, 그림 같은, 탁 트인, 겨울바다... 초점을 풀어버리고 지그시 바라보노라면 응어리진 마음도 이내 풀어지겠지. 아니면 짐짓 훌훌 털어버리든가. 수평선 위에 환각처럼 뿌옇게 펼쳐지는 노을을 응시하며 가만히 스스로를 다독여도 보고. “힘든 한해, 고생 많았어. 새해는 마음 다잡고 잘 풀어보자고...” 그리하여 서른 명 남짓이 1박2일 바닷바람을 쐬고 돌아왔다. 겨울, 그것도 바쁜 연말에 길을 나서..
2022.12.14 -
어떤 '햅쌀밥'
늦가을. 황금 물결 일렁이던 들녘은 다시 텅 비어 태초의 흙빛으로 돌아갔다. 황금 물결은 탐스러운 결실로 탈바꿈해 곳간으로 너울너울 흘러들었다. 그리하여 넉넉한 시절이다. 지난 이태, 흉작의 안타까움에 싸늘하던 고산 고을 농부들의 낯빛도 발그레 피어나는 가을이다. ‘풍년가’는 언제나 흥에 겨운 법이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건조를 거친 나락, 방아를 찧었다. 벼농사두레 경작회원들이 거둬들인 나락을 모두 찧자니 그 양이 꽤 되어 이틀 걸려 도정을 마쳤다. 논배미 크기에 따라 소출은 제각각이지만 햅쌀 자루를 실어나르는 흐뭇함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것으로 한 해 벼농사는 모두 마무리되었다. 올해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황금들녘 풍년잔치’를 건너뛰었지만, 평년작을 웃도는 만큼 ‘풍작’은 분명한 현실이다. 곳간을 가..
2022.11.09 -
계란으로 바위를 깨다
몹시도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비봉 돼지농장 재가동을 둘러싼 행정소송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주민과 완주군이 승소한 것이다. 그야말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다윈이 이긴 셈이다. 광주고등법원 전주 행정1부(부장판사 백강진)는 지난 9월14일 열린 ‘가축사육업 불허가처분 취소 청구 소송’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업체 쪽의 항소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비봉 돼지농장 재가동을 불허한 완주군의 행정조치가 정당하다고 본 1심 판결을 유지한 것이다. 재판부는 판결에서 “중대한 공익상 필요가 있다면, 법령에 명문 근거가 없더라도 어느 정도 재량판단하여 허가를 거부할 수 있다”고 전제한 뒤 완주군이 불허가를 내린 세 가지 처분사유 모두가 정당하다고 보았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육시..
2022.09.19 -
에어컨이 뭐길래
7월말~8월초.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예전의 기억으로는 여름휴가가 몰리는 기간. 여전히 바뀌지 않은 사실은 연중 가장 더운 시기라는 것. 실제로 그렇다. 수은주는 연일 섭씨 35도까지 치솟고 습도까지 높아 그야말로 푹푹 쪄대는 나날이다. 이 찜통더위는 밤까지 이어져 잠을 제대로 못 이루는 ‘열대야’가 일상이 되고 있다. 하긴 지난 7월초에 이미 겪었던 현상이고, 미리 예행연습을 해 둔 효과라고 해야 할까? 버겁기는 해도 그럭저럭 견뎌내고 있다. 에어컨 없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올해로 7년째 ‘에어컨 없는 한여름’을 나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집, 경량목구조에 단열에 신경을 써서 지었더랬다. 겨울철 난방에 쓰이는 에너지를 최대한 줄이고, 한여름 냉방에 드는 전력을 최소화하자 했었다. ‘견물생심’이..
2022.08.08 -
'마음'이 문제다?
세상을 살다 보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상황에 부닥칠 때가 더러 있다. 특히나 사람 관계에서 이런 일이 빚어지면 그 결과가 사뭇 참담해지기도 한다. 예컨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했는데 상대가 이를 형편없이 폄훼하는 경우다. 심지어 최선의 노력 그 자체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싫어하기도 한다.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답답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당최 어쩌란 말인가. 이런 일은 사람 관계뿐 아니라 자연 관계, 가령 농사에서도 벌어진다. 물론 식물이란 게 판단능력이나 감정을 지닌 존재가 아니니 사람처럼 변덕을 부리거나 싫증을 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 안에 설정된 생장 프로그램에 따라 스스로를 밀고 가면서 종종 사람(농부)의 뒤통수를 치기도 한다. 생각지 못한 사달이 끊이지 않은 올해 벼농사...
2022.07.14 -
모내기철, 숨이 막힌다
장대비가 쏟아진다. 소나기. 잠시 그쳤다가는 이내 다시 퍼붓기를 거듭하고 있다. 빗줄기가 세차서 농작업을 하지는 못하지만 반갑기 그지없다. 아, 양파를 캔 뒤 햇볕에 널어 말리고 있는 농가한테는 야속하기 짝이 없는 비라는 점이 걸리긴 하다. 그래도 미안하지만 내 코가 석 자이니 ‘표정관리’ 하고 있을 겨를은 없다. 한 달 넘게 가뭄이 계속되던 터다. 온 들녘이 타 들어가 작물이 말라 비틀어지던 중이었다. 물이 없어 모내기를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곳도 있었다. 우리 벼농사두레 회원들의 논배미가 스무 마지기 넘게 모여 있는 샘골이 그랬다. 저수지 수문이 고장 나는 바람에 물이 빠져 나갔고, 가물 즈음에야 수리가 끝나 물을 충분히 가두지 못했다. 수문 관리자는 나름 물을 아끼겠다며 꽁꽁 잠가두고 열지를 않아..
2022.06.17 -
'멘붕'에 대처하는 농부의 자세
이런 날벼락이 또 있을까. 그야말로 ‘멘붕’ 상황. 볍씨 담가 모판에 파종하고 사나흘 숙성시킨 2천판을 못자리에 앉혔는데 싹이 올라오지 않았다. 하여 그 공정을 고스란히 되풀이하고 있는 중이다. 귀농하고 지난 10년 동안 ‘쌀 전업농’의 길을 걸었다. 줄곧 밥맛 좋기로 유명한 ‘신동진’ 품종을 지어왔다. 그러나 밥맛은 좋지만 병충해에 취약한 약점을 안고 있었다. 그 탓에 신동진 벼를 심은 농가는 지난 이태 잇따라 대흉작을 맞은 바 있다. 안 그래도 신동진 품종이 개발된 지 20년을 지나면서 기능이 퇴화하는 문제가 있었고, 육종기관에서도 몇 해 전부터 대체품종을 연구해오던 터다. 이에 따라 개발된 ‘참동진’ 품종이 주목을 받아왔다. 요컨대 신동진의 약점이던 내병성을 더욱 높이고 밥맛도 개선했다는 것. 이에..
2022.05.19 -
농한기, 그 마지막 '몸부림'
이젠 꼼짝없이 농사철이다. 볍씨를 파종할 때 쓰는 상토가 오늘 토착했으니 말이다. 더는 “아직도 농한기가 끝나지 않았네” 우길 수 없게 된 것이다. 아쉽지만 세월을 어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대보름 지나 노란 복수초 피어나고, 우수 경칩 지나 매화가 피어날 때까지도 “밭농사는 시작됐지만 벼농사는 아직 멀었다”며 짐짓 여유를 부렸더랬다. 하여 지난 며칠, 농한기의 마지막 ‘몸부림’이라도 되는 듯 여기저기를 싸돌았다. 봄바람도 쐬고 꽃구경도 할 겸 해서다. 부러 남들 일하는 평일을 골라 길을 나섰더니 차도 막히지 않고 발길 닿는 곳마다 그렇게 호젓할 수가 없었다.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차창을 스쳐가고, 저 아랫녘에서는 어느덧 꽃비로 흩날리며 아찔한 정경을 연출하는 것이었다. 사람들 발길이 뜸한 고즈넉한 ..
2022.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