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에 말걸기/<낭만파 농부>(74)
-
여느 때와는 다른올해 정월대보름을 보내며
[낭만파 농부] 벼농사두레 대표 6년 By 차남호 2024년 02월 29일 09:33 오전 이 얼마 만인가. 한 주 내내 겨울비가 이어지고 잔뜩 흐려 있던 하늘에 볕이 쨍하다. 다사로운 햇볕 한 줌이 그토록 소중한 시절. 어느새 잔뜩 물오른 들녘이 더욱 싱그러워 보인다. 벙근 매화 꽃망울마냥 봄기운도 저절로 부푸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에 기별을 전하는 것도 퍽 오랜만이다. 지난해 끝 무렵 ‘고산권벼농사두레’가 임기만료에 따른 임원선거 국면에 접어들면서 글을 쓸 엄두를 내기 어려운 탓이었다. 내가 대표를 맡았던 지난 6년을 갈무리하는 일도 그랬거니와 후보로 선뜻 나서는 이들이 적어 애를 먹어야 했다. 다행히 훌륭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이들로 새 집행부가 들어서 홀가분하게 짐을 넘겨줄 수 있었다. 그..
2024.03.09 -
월여산 산행을 다녀오고
[낭만파 농부] 농한기의 일탈 계획 By 차남호 2023년 11월 27일 04:09 오후 뒷산을 오르는 발걸음이 무겁다. 첫 오르막부터 허벅다리가 뻐근해 오니 말이다. 어제 등산모임 ‘사니조아’를 따라 해발 8백 미터 넘는 월여산을 타고 온 후유증이겠다. 벼농사가 얼추 끝물에 접어드는 초가을부터 운동 삼아 매일 뒷산을 타는데 사니조아 등산에는 달포에 한 번 남짓 함께 하는 편이다. 물론 농사철에는 마음을 내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농사일만으로도 몸뚱이가 너무 버거운 까닭이다. 일이 할랑해지고 농한기에 들어서야 건강을 챙기는 일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된다. 별일 없으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뒷산을 오르고 등산모임에도 따라 나서는 것이다. 어제는 당일치기 산행이라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약속시간을 넘겨..
2023.11.28 -
가을걷이는 끝을 맺고
[낭만파 농부] 햅쌀밥, 설렘과 행복 By 차남호 2023년 10월 31일 03:57 오후 가을걷이를 모두 끝냈다. 올해는 콤바인(수확기계) 작업을 대행해 준 장 선생이 우리 벼두레를 깍듯이 배려해준 덕분에 지난해보다 일찌감치 마무리됐다. 짐짓 홀가분하지만 그렇다고 ‘수확의 기쁨’까지 가벼워진 건 아니다. ‘첫수확’의 설렘을 안고, 벼이삭 넘실대는 논배미를 배경 삼거나 그 안에 훌렁 뛰어들어 기념사진을 찍기에 바쁘던 시절이 있었다. 벼포기를 꽃다발 삼아 졸업노래 가락에 맞춰 “빛나는 햇나락을 터신 언니께…” 흥얼대던 해도 있었지. 풍요로워진 마음에 새참 거리를 바리바리 싸들고 오던 정겨운 모습도. 그러던 이들에게 차츰 농사 연륜이 쌓이면서 가을걷이 풍경도 더러 바뀌게 마련이다. 연륜은 능력을 키우고 안정..
2023.11.04 -
기후위기에도가을과 추석은 돌아온다
[낭만파 농부] 기후정의행진 참여 By 차남호 2023년 09월 26일 11:10 오전 날씨가 선선해졌다. 밤이슬이 내리면 제법 쌀쌀하다. 여름내 열어뒀던 창문을 닫아걸고 긴팔옷을 걸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추석이 내일모레. ‘극한’이란 수식어까지 붙은 폭염과 폭우에 시달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계절이 바뀌고 있다. 역시 자연의 섭리란 거스를 수 없는 모양… 이라고 쓰려다가 화들짝 놀란다. 그 섭리라는 게 무너지고 있지 않은가. ‘온난화’의 경지를 넘어 ‘열대화’로 접어든 지구의 현실 말이다. 날이 선선해지다가 쌀쌀해지고, 이내 추워지다가 끝내 눈보라가 몰아치더라도 파국으로 치닫는 기후위기를 결코 잊지 말아야겠다고. 그래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었을 게다. 지난 주말 ‘923기후정의행진’에 함께 하려..
2023.09.28 -
장마·폭염 이겨낸 벼 이삭
[낭만파 농부] 돼지농장 해결 잔치 By 차남호 2023년 08월 25일 09:39 오전 ‘올해 마지막 쌀’. 소비자한테 택배 보낼 때 동봉하는 안내문 제목이 오늘부터 바뀌었다. 다음달, 그러니까 9월 중순께가 되면 준비한 쌀이 얼추 소진될 듯하다. 다른 해와 견주어 일찌감치 장을 마감하는 셈이 된다. 올해 초만 해도 쌀 주문이 심상치가 않았더랬다. 끝내 남아돌까 걱정이 되어 생각다 못해 ‘맛있게 드시고 주변에 널리 홍보 부탁드린다’는 내용을 택배발송 안내문에 덧붙여 보냈다. 그런다고 문제가 풀릴까마는 지푸라기라도 부여잡는 심정이었던 것. 그 소식을 전해들은 벼농사두레 도반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리저리 선이 닿는 대로 판매를 주선해준 ‘구원의 손길’ 덕분에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그 마음 씀씀이..
2023.08.25 -
장마통에 쓸려간 것들
[낭만파 농부] 폭우 폭염 이어지고 By 차남호 2023년 07월 31일 09:15 오전 [알림] 양력백중놀이를 취소합니다 이번 주 말 진행할 예정이던 벼두레 주최 2023년 양력백중놀이를 전면 취소합니다. 오랜만에 햇볕이 쨍하고, 날씨가 쾌청한데 어인 일인가 의아하실 분이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일기예보에 따르면 오늘과 내일 반짝 갰던 날씨는 주말을 앞두고 다시 장맛비가 이어진다고 합니다. 굵은 빗줄기 속에서, 그리고 물이 불어난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는 건 몹시 위험하지요. 아울러 전국을 강타한 극한폭우로 많은 이재민과 인명피해가 발생한 상황이라 다들 무척 심란하다는 점도 감안했습니다. 더러 아쉽더라도 이 점 깊이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조만간 다른 멋진 프로그램으로 아쉬움을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
2023.08.10 -
비봉 돼지농장 분쟁,드디어 주민 승리로 끝나
[낭만파 농부] 큰 잔치 벌이고 싶어 By 차남호 2023년 06월 27일 06:46 오후 모내기 하고 보름이 되어간다. 볏모가 논배미에 뿌리를 내린 지 이미 오래고 이제 식구를 늘리는 ‘새끼치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실낱같던 벼포기들은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고 몸집을 불리고 있다.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 모내기에 맞춰 비가 흠씬 내려줘야 벼의 생장뿐 아니라 잡초억제에 도움이 되는 법이다. 하지만 올해는 내내 가뭄이 이어지는 바람에 적잖은 어려움이 따랐다. 날씨가 무덥고 가물다 보니 해캄 따위 이롭지 않은 조류와 물달개비 같은 잡초가 번성하고 있다. 물론 왕우렁이를 풀어 넣어 먹어 치우도록 하고 있지만 힘에 부치는 모습이 또렷하다. 그나마 모내기를 마칠 즈음 단비 같은 소식이 전해져 시름을 덜게..
2023.07.19 -
이 아름다운 풍경을...
[낭만파 농부] 부직포 밑 볏모 얼굴 By 차남호 2023년 05월 31일 12:02 오후 ‘장미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울안 잔디마당에 붉디붉은 자태로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눈을 돌려보면 장미만이 아니다. 장미의 팔촌쯤 되는 하얀 찔레꽃부터 창포 붓꽃 데이지 금계국 수레국화 꽃양귀비…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초본과 이름들이 5월 꽃철을 수놓은 것이다. 이른 봄을 화사하게 물들였던 매화 복사 배꽃이 진 자리에 매달린 열매들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나무는 신록에서 짙은 녹음으로 하루가 다르게 우거진다. 그리하여 숲은 더욱 울창하고 깊어간다. 뻐꾸기 소쩍새 지빠귀 딱새 휘파람새 두견이… 거기 깃들어 사는 여름새들의 지저귐은 교향악처럼 울리다가 어느 순간 아련해 온다. 산자락엔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
2023.06.12 -
문경 희양산 나들이
[낭만파 농부] 본격 농사철 앞두고 By 차남호 2023년 04월 25일 11:20 오전 이젠 꼼짝없이 농사철이다. 이번 주말에 볍씨를 담그니 말이다. 손가락을 꼽아보니 벼농사가 올해로 열두 번째다. “농사라는 게 몇십 년을 해도 해마다 1학년”이라는 옆 마을 늙은 농부의 얘기가 떠오른다. 뭐 실제 그렇지는 않겠지만 농사를 처음 시작하는 마음은 늘 부담스럽다. 10년 가까울 때까지도 농사철이 다가오면 지나간 해의 기록들을 일일이 뒤적이면서 준비할 농자재와 필요한 작업을 몇 번씩 확인했더랬다. 그래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불안감이 떼쳐지질 않는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초반 모농사의 경우 일을 크게 그르치는 사고를 몇 차례 겪다 보니 더더욱 신경이 곤두선다. 품종이 다른 볍씨가 뒤섞이는 바람에 다..
2023.04.27 -
제철 맞은 봄꽃들의 잔치
[낭만파 농부] 올해도 ‘탐매’ 나들이 By 차남호 2023년 03월 22일 07:01 오전 울안에서도 꽃잔치가 시작됐다. 3월이 열리자마자 꽃망울을 터뜨렸던 청매는 절정기를 지나 이미 시들고 있다. 어림셈을 해보니 지난해보다는 보름, 평년보다는 일주일 남짓 빨라 보인다. 바통터치 하듯 옆자리의 홍매가 이제야 피어나고 있다. 꽃피는 섭리란 당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활짝 피어난 청매를 보노라니 느닷없이 조급증이 일어 아랫녘으로 ‘탐매’ 나들이를 다녀왔더랬다. 열흘 전 일이다. ‘매화마을’ 이름값을 하느라 널찍한 산자락이 온통 연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사이사이 빨간 홍매화, 노란 산수유가 점점이 박혀 운치를 더했다. 싸한 매향이 내내 콧속을 맴도는 것이었다. ‘매화축제’가 시작되기 전날이고 평일이라 사람에..
2023.04.11 -
출범 10년 앞둔벼농사두레의 올해 포부
[낭만파 농부] 벼농사 외 활동 확장 By 차남호 2023년 02월 02일 04:36 오후 어느덧 새해도 달포가 지나갔다. 그런데 올해 1월은 좀 별쭝맞다 싶게 바삐 돌아간 듯하다. 해가 바뀌든가 말거나, 늦도록 이불 속에 뭉그적대는 아침처럼 한껏 느긋한 게 농부의 1월 아니던가. 게다가 날짜 감각 둔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나로서는 더더욱 그러한데 이번엔 달랐다. 물론 여느 해보다 설이 일렀던 점이 있다. 내내 무신경하다가 설을 맞고서야 해가 바뀌었음을 알아채는 게 농부의 습성이니. 그로부터 사부작거리기 시작해 대보름 어간에 이르러서야 몸을 부리는 생체리듬 말이다. 어인 ‘라떼’ 타령이냐 싶겠지만 나같이 벼농사를 전업으로 하거나 아직도 농한기가 살아있는 농부들에게는 엄연히 ‘실화’다. 암튼 2월 중순에..
2023.02.02 -
특별한 수업과 영화제
[낭만파 농부]시골살이의 어떤 풍경 By 차남호 2022년 12월 28일 10:06 오전 오늘은 집에서 1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동네 초등학교에 다녀왔다. 거기 6학년 아이들과 얼마 전 펴낸 졸저 (사우)을 두고 얘기를 나눴다.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특별수업. 그동안 이 책을 끈으로 비슷한 자리에 몇 차례 불려 다녔는데, 나로서는 오늘 수업이 여러모로 흥미를 끌었다. 귀농할 무렵 초등학생이던 둘째 아이가 이 학교를 2년 다니고 졸업한 인연이 있다. 그 바람에 나는 나대로 얼떨결에 팔자에 없는 학부모회장 노릇을 하기도 했던 추억이 서린 곳이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 아이가 졸업하고 나서도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이 학교는 해마다 6월 초에 ‘단오맞이 한마당’이라는 잔치를 열어왔는데(지금은 ..
2022.12.28 -
다시 맞은 '농한기'의 단상
[낭만파 농부] '농부'의 삶 선택 이유 By 차남호 2022년 11월 28일 10:40 오전 “바스락” “바스락” 뒷산 오솔길에 쌓인 낙엽을 사뿐사뿐 밟으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경쾌하게 울리는 소리. 쌓인 지 얼마 안 되는 데다 바싹 마른 넓은잎인 까닭에 울림이 더 크다. 빗줄기에 아침이슬에 눅고 미생물들이 갉고 나면 시나브로 사라질 소리. 누런 솔가리가 두껍게 깔린 구간을 지나노라면 그 낙엽 밟는 소리는 이내 잦아든다. 알록달록 산자락을 수놓았던 단풍이 나풀나풀 떨어져 쌓인 융단은 그야말로 가을의 끝자락이겠다. 바스락거리는 가을의 끝자락 가을이 가고 나면 겨울이지만 나한테는 겨울보다 ‘농한기’가 더 입에 짝짝 달라붙는다. 늘 해온 얘기지만 농한기를 기다리는 맛에 농사를 짓는지도 모르겠다. 뒤집어 말하..
2022.12.03 -
처서, 가을이 오려나'기후위기'를 잊지 않아야
[낭만파농부] 무더위가 꺾이는 시간 By 차남호 2022년 08월 24일 02:04 오후 처서날, 아침부터 온종일 비가 내렸다. 24절기 가운데 열네 번째, ‘더위가 그친다’는 뜻을 담고 있는 절기 처서. 흔히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고 하여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을 느끼게 되는 때. 그렇더라도 햇살은 아직 후끈 내리쬐어 작물의 광합성을 도와야 마땅하건만 비가 내리다니. 처서에 비가 오면 ‘십 리에 천 석을 감하여’ ‘독 안에 든 쌀이 줄어든다’고 했던가. 맑은 바람과 따사로운 ‘남국의 햇볕’을 받아 기운찬 가루받이로 ‘장벼를 패야’ 하거늘 처서비(處暑雨)라니 이 어인 노릇이란 말인가. 그래도 우리는 일주일 남짓 늦게 모를 냈으니 이삭 패는 시기도 그만큼 늦겠거니 한가닥 위안거리가 떠올..
2022.08.26 -
반가운 소식···장마 끝, 본격 무더위 시작
[낭만파 농부] 벼농사, 새로운 국면 By 차남호 2022년 07월 25일 01:14 오후 ‘양력백중놀이’를 다녀온 다음 날, ‘백만 년만에’ 기타 줄을 갈았다. 갈아야 할 시점이 지나도 한참 지났건만 농사철로 접어들면서 때를 놓쳤더랬다. 바쁘기도 했거니와 뜻하지 않게 일이 꼬이고 어수선해져 단 몇 십 분, 겨를을 내지 못한 탓이 컸다. 그 몇 달 동안은 당연히 기타 한 번 손에 잡을 한 자락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것이지. 벼농사는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숨가쁜 새끼치기로 식구를 늘리는 영양생장에서 이삭을 올리고 나락을 여물게 하는 생식생장으로. 농부는 이때 ‘중간물떼기’를 해서 힘을 보탠다. 아니 농부 스스로를 이롭게 한다고 해야 하겠다. ‘생식생장’ 국면으로 접어든 논배미 모를 내고 한..
2022.08.08 -
‘창고파티’가 벌어진 이유
[낭만파 농부] 사연 많았던 모내기 By 차남호 2022년 06월 27일 04:47 오후 간밤에는 잔치가 벌어졌다. 해마다 모내기를 끝내고 펼치는 ‘모내기 무사 완료 가든파티’. 이번엔 우리 집 잔디밭이 아닌 모모 씨네 창고 앞마당이었다. 스무 명 넘는 이가 때 이른 한여름 밤의 정취를 즐겼다. 그런데 왜 잔디마당이 아니고 하필 창고였느냐? ‘창고 파티’ 며칠 전 끝난 모내기, 아니나 다를까 숱한 곡절을 겪었다. 다른 일도 그렇지만 농사라는 게 한번 틀어지면 잇따라 애를 먹게 되는 모양이다. 모농사를 한 번 망치고 나니 그 뒤로도 뒷탈이 끊이지 않았다. 두 번째 앉힌 못자리는 두둑 표면이 고르지 않아 듬성듬성 이빨 빠진 모판이 많이 나와 모판 부족 사태를 겪지 않을까 가슴을 졸여야 했다. 다행히 이앙기 ..
2022.06.30 -
벼농사두레의 힘,고마움과 자랑스러움...
[낭만파 농부] 새벽 빗소리에 깨다 By 차남호 2022년 05월 27일 12:27 오후 새벽 1시 30분. 빗소리에 잠을 깼다. 아니, 밤사이 비가 내릴 거란 엊저녁 일기예보에 사로잡혀 있던 무의식이 흔들어 깨웠는지도. 어찌나 반갑던지 저도 모르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폰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이내 오밤중이건 말건 벼농사두레 단톡방에 “비온다!” 외마디 탄성과 함께 동영상을 올린다. 안 그래도 비를 애타게 기다리는 톡이 줄줄이 올라와 있던 참이다. “기우제를 지냅시다!” “비소식 떴는데…” “이번엔 제발 ‘뻥’이 아니길” “내일은 비님이 꼭 와주시기를” 이 얼마 만이던가. 느낌으로는 몇 달은 되었지 싶은데 기록을 뒤져보니 딱 한 달 만이다. 물이 한참 아쉬운 농사철에 한낮으로는 섭씨 30도를 넘나드는 이른..
2022.05.28 -
사람이 그리웠던 게다
[낭만파 농부] 다시 봄기운 느끼며 By 차남호 2022년 03월 31일 10:17 오전 역시 봄이다. 물오른 신록과 빛깔 고운 꽃들로 하여 불현듯 눈에 띄는 봄이기도 하다만 이번에는 따뜻함 또는 포근함에서 비롯되었지 싶다. 사실 지난 겨울은 몹시 추웠더랬다. 날씨 탓에 난방비도 많이 들었지만 무엇보다 때 맞춰 펼쳐진 대선, 서로 물어뜯기 바쁜 진흙탕 개싸움에 넌덜머리가 나고 그래서 더 추웠는지도 모르겠다. 그 이전투구가 어서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선거판이 막을 내리고 나서 들녘을 굽어보니 거기에 벌써 봄이 와 있었다. 하지만 여느 해와 달리 꽃은 좀 볼품이 없어 보인다. 겨울이 길었던 탓인지 일주일 남짓 늦게 피어났고 송이도 많이 줄어든 느낌이다. 지금도 서리가 하얗게 내리는 걸 보면 꽃샘추위..
2022.04.14 -
눈을 뜨니 새벽 두 시
[낭만파 농부] 혼술을 그만둔 내력 By 차남호 2022년 01월 25일 09:53 오전 눈을 뜨니 새벽 두 시. 창밖으로 앞산 자락이 희뿌윰하게 비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칠흑 속에 묻혔다. 잠은 싹 달아나 버렸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대고립의 시간이 펼쳐지겠지. 달밤에 체조할 일도 아니고 환장할 노릇이다. 요즘 밤 시간이 거의 이 모양이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어서도, 번뇌에 짓눌려서도 아니다. 이를 불면증으로 보아야 할지 아닌지도 좀 헷갈린다. 분명한 사실은 이게 술에서 비롯된 현상이라는 점이다. 술에 취한 탓이 아니라 술 마시기를 그친 데 따른 ‘부작용’이라는 얘기다. 창문에 어른대는 새벽 풍경 ‘혼술’을 그만둔 지 이제 두 달이 되어 간다. 저녁을 먹고 나면 으레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홀짝이던 버..
2022.01.27 -
낙엽 쌓인 뒷산 오솔길
[낭만파 농부] 겨울은 더 깊어가고 By 차남호 2021년 12월 23일 01:34 오후 뒷산을 타고 왔다. 그러니까 나흘 만인가, 닷새 만인가? 별일 없으면 날마다 하던 짓인데 코로나19 백신 3차 접종으로 그새 쉬었더랬다. 접종 뒤 며칠 동안은 무리하거나 심한 운동을 삼가라는 지침 때문이다. 앓고 있는 ‘기저질환’이 도질 기미를 보이면서 지난해 가을 무렵부터 ‘유산소운동’ 차원에서 집 뒷산을 꾸준히 오르던 터다. 마을을 ‘좌청룡-우백호’로 두른 산자락 능선을 따라 30분 남짓 돌아오는 코스다. 야트막하지만 높낮이가 뚜렷해 땀이 송골송골 맺힐 만큼 에너지 소모가 큰 편이라 운동 효과가 없지 않았다. 땀으로 목욕을 하는 바쁜 농사철이야 달리 운동이 필요 없으니 건너뛰고. 초겨울이라선지 오솔길에 쌓인 낙엽..
2021.12.27 -
서로 다른 두 번의 잔치
[낭만파 농부] 썰물 빠진 뒤의 적막 By 차남호 2021년 11월 24일 09:23 오전 주말 이틀 밤 내리 잔치를 벌였다. 서로 다른 두 번의 잔치. 잔치 첫날은 모두가 아는 사이지만 내가 속하지는 않은 무리, 그러니까 대학 1년 선배들 동문모임이다. 1980년대 초반 신군부 정권의 엄혹한 독재에 저항하던 이들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이라 할 집회, 시위, 언론, 표현의 자유가 원천봉쇄 됐던 시대다. 정보기관원과 비밀경찰이 대학 캠퍼스에 상주하며 감시의 눈을 번뜩이던 시절이다. 투쟁방법으로는 기습시위가 유일했고 주동자는 감옥살이를 면할 수 없었다. 적극 가담자, 경우에 따라서는 단순 가담자라도 군대에 강제 징집되어 ‘녹화사업’에 시달릴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러니 활동은 살얼음판을 기듯 늘 가슴을 졸여야 ..
2021.11.24 -
2년 연속 흉작이었지만,돼지농장 소송은 승리해
[낭만파 농부] 씁쓸함-반가움 교차 By 차남호 2021년 10월 26일 10:36 오전 “햅쌀이 나왔습니다. 2년 연속 최악의 흉작이지만 그래도 좋은 쌀을 보내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다만 현지 쌀값 급등에 따른 임대료 상승 등 인상요인이 누적돼 불가피하게 공급가를 현실화했습니다. 이 점 헤아려주시고 좋은 쌀로 갈음하시기를~ 무농약-무비료 우렁쌀! 생태가치 담긴 두레쌀! 게다가 밥맛 없으면 쌀값 돌려드려요^^” 올해 벼 수확량은 ‘역대급 흉작’이라던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막상 현실로 마주하고 나니 몹시 씁쓸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갈 길 가야지 했는데 가을장마로도 모자랐는지 무시로 가을비가 쏟아졌다. 나락이 젖으면 콤바인 작업을 할 수가 없는지라 여적 절반밖에 거둬들이지 못했..
2021.10.26 -
저 논만 보면 애가 끓는다
[낭만파 농부] 갈 길 가야지 어쩌랴 By 차남호 2021년 09월 27일 09:09 오전 아직도 저 논만 보면 애가 끓는다. 하루가 다르게 누런빛으로 물들어 넘실대야 할 그 곳은 허여멀겋게 또는 칙칙한 잿빛으로 시든 벼이삭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삭이 팰 무렵 가을장마가 보름 넘게 이어지면서 심각한 병충해가 온 들녘을 휩쓴 것이다. 태풍 오마이스가 순하게 지나간 직후만 해도 “벼이삭은 거의 다 올라왔고 비바람의 피해도 없어 보인다, 다행이다”고 낯술판 벌이며 “술맛 떨어질 일은 없겠구나” 까불었던 이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다. 한두 가지를 빼고는 그야말로 작년 이 맘 때와 판박이. 지난해는 두 달 넘는 장마와 잇달아 덮친 태풍이 ‘백수현상’을 낳았다면, 올해는 장마에 따른 다습한 환경이 ‘목도열병’으..
2021.09.27 -
태풍 오마이스 지나간 후
[낭만파 농부] 팬데믹의 어떤 낮술 By 차남호 2021년 08월 25일 12:50 오후 태풍 오마이스는 다행히도 수굿하게 지나갔다. 태풍이 지날 때면 지붕과 뒷산 수목들, 그리고 땅바닥에 퍼부어대는 요란한 빗소리에 잠이 깨서는 밤새 뒤척이게 마련인데 이번엔 이른 아침에 고이 눈을 떴다. 온라인에 접속해 ‘태풍경로’를 뒤져보니 동해 바다에서 온대 저기압으로 변질돼 소멸됐다는 뉴스가 뜬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내리치고 바람까지 불어 유리창에 줄줄이 흘러내린다. 이내 마음이 심란해진다. 지금은 벼이삭이 한창 고개를 올리고 가루받이를 하는 철, 출수기다. 벼는 ‘자가수정’을 하는 식물이고 날씨가 좋지 않아도 낱알 껍질 안에서 수분이 이루어진다지만 비바람이 거..
2021.08.26 -
양력 백중놀이의 즐거움그리고 돼지분뇨와 전쟁
[낭만파 농부] 코로나와 시골살이 By 차남호 2021년 07월 28일 10:20 오전 오늘 아침, 읍내 병원에서 코로나19 백신(모더나) 1차 접종을 받았다. 언론 보도와 주변 사람들의 경험담 속에서 은근히 후유증이 걱정됐더랬다. 한동안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무거우며, 피로감이 느껴졌지만 그리 심한 편은 아니다. 좀 심했던 숙취 탓인지도 모르겠다. 전국의 확진자 수가 갑자기 네 자리로 늘어나더니 20일 넘게 4차 대유행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답답한 노릇이다. 백신 접종을 시작한 지가 언제인데 끝마친 인구가 여적 15%에도 못 미치고, 1차 접종자도 전체인구의 1/3에 지나지 않는다. 상황이 좀 나아진다 싶으면 방역을 늦추는 섯부른 조치가 반복된 탓이 크지 싶다. 방역조치는 바싹 조이면서 그에 따른 ..
2021.07.29 -
온종일 뙤약볕 아래,연중 가장 바쁜 모내기철
[낭만파 농부] 난리 치른 듯 어수선 By 차남호 2021년 06월 29일 09:12 오전 마침내 한 달 가까운 모내기철이 끝났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연중 가장 바쁜 시절. 꼭두새벽 일어나 뙤약볕 아래 온종일 종종거리는 농가의 풍경이 그대로 펼쳐지는 때. 모내기는 논바닥에 모를 꽂아 심는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오랜 준비가 필요한 공정이다. 못자리의 모가 쑥쑥 자라 옮겨 심을 때가 다가오면 논배미를 만들어야 한다. 논배미 만들기는 모내기 준비과정을 말하는데 논두렁을 손보는 일에서 시작된다. 허물어지거나 낮아진 논둑을 손보는 작업으로 요즘은 ‘논둑조성기’라는 기계의 힘을 빌리는 게 보통이다. 트랙터에 매단 기계가 논둑을 지나가면 매끈하고 가지런하게 보강된다. 논둑 상태에 따라 2~3년에 한 번 이..
2021.06.29 -
낯선 물못자리 공동작업
[낭만파 농부] 즐거우면서도 씁쓸함 By 차남호 2021년 05월 25일 10:28 오전 벼농사 철로 접어든 지 이제 달포가 다 되어간다. 볍씨를 담가 촉을 틔우고 모판에 넣어 못자리에 앉히는 작업이 끝났고, 지금은 못자리에서 볏모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지난 스무날 동안 날마다 물을 대주고, 무슨 탈이 나지 않았는지 살피면서 정성껏 돌봐오던 터다. 다행히도 하늘이 도와 가물지 않고 알맞게 비를 뿌려주어 애를 먹지는 않았다. 내일 저녁엔 그 동안 보온을 위해 덮어두었던 부직포를 걷어낼 참이다. 모가 웃자라는 걸 막고, 모내기 때까지 상온에 적응시키기 위함이다. 하얀 장막을 걷어내고 나면 천연잔디구장 뺨치게 아름다운 열세 줄의 짙푸른 융단이 그 장관을 드러낼 것이다. 논배미 위에 펼쳐지는 ‘인공미’라고 ..
2021.05.25 -
연둣빛 뒷산, 다시 농사철
[낭만파 농부] 벼농사두레의 도반들 By 차남호 2021년 04월 21일 09:32 오전 세상이 온통 연둣빛으로 물들고 있다. 지난 달포 어간, 먼 산자락은 점점이 박힌 파스텔 톤의 연분홍빛으로 넘실대던 터다. 이제 돋아난 새순이 잎으로 피어나면서 들녘의 색감도 바뀌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둔갑술이다. 날마다 오르는 뒷산의 풍광 또한 하루가 다르게 표변하고 있다. 낙엽이 지고부터 겨울을 나는 동안 산은 내내 칙칙한 빛이었다. 그 지루한 정경은 겨우내 바뀌지 않았다. 봄꽃들이 저마다 앞다퉈 피어오를 때까지. 연두 빛 속에 핀 철쭉 숲의 주인공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간다. 진달래와 산벚꽃은 이제 말끔히 자취를 감추었고 다채로운 빛깔의 철쭉 무리가 여기저기서 그 무르익은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하지만 ..
2021.04.22 -
마침내 봄은 올 것이다
[낭만파 농부] 복수초, 화암사, 매화 By 차남호 2021년 02월 25일 11:02 오전 역시 봄은 꽃이다. 산기슭에 점점이 자리를 잡고, 한참 피어오르고 있는 샛노란 복수초를 바라보니 과연 그렇다. 무엇인가 보인다 해서 봄이라 했다지 않는가. 초목이 고스러지고 헐벗어 칙칙한 들녘에 불현듯 나타나는 고운 빛의 그 무엇이 눈에 확 띌 것임은 자명한 일. 학술적으로야 그 어원이 ‘빛’, ‘볕’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그 또한 같은 맥락이니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화사한 복수초로 하여 비로소 새봄을 만난 셈이 되었다. 엊그제, 그러니까 지난 주말을 맞아 봄을 찾아 마음먹고 나선 화암사 나들이 길이었다. 산사로 통하는 골짜기 양지바른 길섶에서 노란 꽃무리를 만난 것이었다. 그날따라 초여름이라도 된 듯 ..
2021.02.25 -
공존·공생의 '방울소리'
[낭만파 농부] 새털구름이 가득하다 By 차남호 2021년 01월 28일 09:05 오전 “딸랑 딸랑” 등산화에 매달린 방울 소리가 참 청아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 발길에 맞춰 가지런히 울리니 리듬감이 생기는 듯도 하고, 허공을 가르는 또렷한 소리파장 덕분에 잡생각이 달아나는 것도 같다. 이렇듯 방울 소리 들으며 뒷산 오솔길을 거닐어 온지 이제 달포가 되어간다. 난데없이 어인 방울이냐고? 누군가는 남명 조식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조 영남유학의 양대산맥을 이룬 산림처사. 대쪽 같은 기개와 지독한 자기절제로 유명했던 남명은 늘 깨어있는 삶을 살고자 품에는 경의검(敬義劍)이라는 장도를, 옷고름에는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차고 다녔다 전해진다. 성성자는 걸을 때마다 ..
2021.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