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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슬픔의 가을
11월하고도 중순, 산야가 온통 단풍으로 물들었어야 마땅하거늘. 지금 창밖에 비친 풍경은 여전히 푸른 빛이다. 벽을 타고 오른 담쟁이만 발그레하게 물이 들었을 뿐. 여느 해 같으면 ‘마지막 잎새’까지 다 떨어져 덩굴만 앙상할 시점이다. 이 어인 조화인지. 하지만 답은 그리 어렵지 않게 풀린다. 올해는 여름이 늦게까지 이어졌으니 단풍 또한 그만큼 늦어지는 게 당연한 자연의 섭리인 게지. 추석이 지나도록 섭씨 35도를 넘나드는 폭염이 지속됐던 기억이 다시 살아난다. 단풍이 늦어서가 아니라 기후변화로 혼란스러워진 자연현상이 심란한 것이다. 계절을 착각해 봄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오니 말이다. 입동이 며칠 전이었다. 초겨울에 접어들 시점이지만 아직도 화창한 가을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기후위기 걱정만..
2024.11.15 -
기후정의! 강남대로를 가다
다시 서울 가는 전세버스에 몸을 실었다. 지난해에 이어 일 년 만이다. 기후정의행진> 완주지역 참가단 85명의 한 사람으로. 지난해보다 참가자가 많아 버스도 두 대에서 세 대로 늘었다고 한다. 지난 2019년 첫발을 뗀 기후정의행진은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전국의 시민이 한 곳에 모여 성장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를 혁파하고 기후불평등 해소와 거대한 전환의 흐름을 만들려는 자발적 운동이다. 올해는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는 슬로건을 내세워 서울 강남대로에서 열렸다. 3만을 헤아리는 이들이 저마다 자신의 절박한 호소를 쏟아냈다. 본대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으리으리한 고층빌딩이 늘어선 강남대로-테헤란로를 행진하며, 그 심각성에 견주어 무심하고, 무기력한 기후위기 대응에 각성을 호소하고, 급진적인 체제-정책전..
2024.09.10 -
엎친 데 덮친 그 다음
한 줄기 소나기가 시원하게 쏟아지더니 따갑게 내리쬐던 땡볕이 잠시 누그러졌다. 지난 한 주일 어간의 날씨가 이 모양으로 이어지고 있다. 열대우림 지역에서 나타나는 스콜(squall)과 비슷한 현상이다. 아니 그냥 스콜이라 해도 틀림이 없겠다. 오랜 가뭄 뒤에 늦게 찾아온 장마전선이 여느 해보다 오래도록 한반도 상공에 머물고 있다고 하는데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이 땅의 기후가 이미 아열대로 바뀌었다는 것이 정설이고 보면 이 시원한 소나기가 그저 반갑지만은 않다. 가뭄이 오래 이어지던 지난 6월 하순, 어쩔 수 없이 가뭄>이라는 노래가 입안을 맴돌았었다. (농촌별곡> 7월호) 어서 빨리 장마가 찾아와 이 가뭄을 씻어주기를 학수고대하던 나날. 그런데 “이 가뭄 언제나 끝나 무슨 장마 또 지려나” 더..
2024.07.29 -
김매기, 폭폭한 노릇
김매기 엿새째. 어느 정도 짐작은 했더라만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 김매기로 말하자면 벼농사 짓는 농사꾼의 숙명이다. 가뭄이 극심했던 7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뒤적여보니 꼬박 6일, 실제 작업은 22시간을 매달렸노라 그해 기록은 말하고 있다. 올해는 그 기록마저 넘어서고 있지 않은가. 안밤실 네 마지기 배미가 문제다. 오늘 아침나절까지 20시간 가까이 김을 매고 있지만 여적 거기를 못 벗어나고 있다. 다른 배미에는 거의 풀이 올라오지 않았는데 유독 이곳만 말썽이다. 여기 물을 대주는 분토 저수지 수문이 지난해 장마에 무너지면서 제방공사가 진행 중인 까닭이다. 올해 말에 가서야 공사가 끝났다고 한다.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공사를 마칠 수 없었는지 ‘늑장행정’에 분통이 터질 노릇..
2024.07.08 -
모판나르기 또는 난장 파티
모내기가 시작됐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그 바쁜 와중에 틈을 내어 이 글을 쓰고 있다. 모농사가 반 농사요, 모내기가 끝나면 벼농사 8할은 마친 셈이 된다. 하여 벼농사두레 공동작업(두렛일)은 못자리 만들기와 모판 나르기가 그 절정이라 할 수 있다. 두레의 아름다운 가치를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일이 가장 고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달포 전 조성한 물못자리에 앉힌 볏모는 그 사이 별탈 없이 잘 자라 주었다. 모내기는 다 자란 이 모들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논배미에 옮겨 심는 공정이다. 그러자면 모를 잘 심을 수 있도록 ‘본답’을 꾸며야 하는데 이를 ‘논배미 만들기’라 한다. 그 과정이 그리 녹록지가 않다. 먼저 우거진 풀을 베어내고 물을 잘 가둘 수 있도록 논둑을 손봐야 한다. 요즘은 ‘..
2024.06.12 -
" '두레'란 게 뭐여? "
주뻐야소.낮에는 뻐꾸기, 밤에는 소쩍새라. ‘뻐꾹 뻐꾹 봄이가네~ 뻐꾹 뻐꾹 여름 오네~’ 계절이 바뀌는 소리. “솥/적/다”고 풍년을 예고하는 애절한 울음. 어쨌거나 벼농사가 시작됐다는 신호 되시겠다. 안 그래도 우리는 5월 첫머리를 모농사로 수놓았다. 볍씨를 담가 싹을 틔워 파종한 모판을 못자리에 앉히는 한 주 남짓한 두렛일이 끝난 것이다. 뜻하지 않은 어려움으로 애를 먹기도 했지만 마무리는 아름다웠다. 못자리에는 지금 앙증맞은 볏모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볍씨 담그는 공정부터 문제가 생겼다. 소금물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염수선 작업은 가뿐했다. 처음 해보는 새내기 일꾼들에게는 날계란을 띄워 염도를 맞추는 과정부터가 신기한 경험이었을 터. 막걸리 잔으로 목을 추겨가며 여유잡고 그 다음 열탕소독을..
2024.05.13 -
꽃비 나리고 새잎이 돋으면
봄인가 했더니 벌써 꽃잔치가 끝나가고 있다. 매화는 진작에 지어 손톱 만한 열매가 맺었고, 개나리를 지나 벚꽃과 배꽃 잎이 허공중에 꽃비로 흩날린다. 지난 며칠 화사한 빛으로 간드러지게 피어났던 복사꽃도 조금씩 제빛을 잃어간다. 봄날은 이렇듯 허망하게 흘러가는 겐가. 눈부신 꽃잎을 떨군 들녘은 이제 연두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면 꽃잎 무리가 솜사탕처럼, 뭉게구름처럼 점점이 박혀 있던 산자락도 차츰 푸른 기운이 짙어간다. 좀 서글프고 야속도 한 시절이 흐른다. 그도 잠시, 아련한 춘심을 추스르고 보면 이게 다 농사철이 되었다는 표식임을 깨닫는다. 농한기, 이제 좋은 시절은 다 갔다. 농사철이 다가오면 먼저 마음을 다잡고, 슬슬 몸도 풀어준다. 걱정이 앞서다가도 막상 농사에 접어든다 싶으면 맘이 ..
2024.04.15 -
봄, 벼농사를 지어보자
아직 꽃샘추위가 더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만 들녘엔 봄기운이 뚜렷하다. 뜰앞의 매화가 첫 망울을 터뜨린 게 경칩이던 며칠 전이다. 같은 고장이라도 자리에 따라 또는 품종에 따라 꽃피는 시기가 조금씩 다르긴 하다. 울안의 매화는 늘 그 자리를 지켜왔으니 날씨의 흐름이 지난해와 엇비슷함을 알겠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러저러하게 통하는 것일까. 바로 그날 동네 단톡방에 ‘화암사 나들이’를 알리는 벙개가 떴다. 느긋한 시절이고, 마침 달리 볼일도 없어 길을 나섰다. 조금은 쌀쌀한 날씨라 단출한 나들이가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뜻밖에도 여섯이나 모였다. 절로 가는 들머리에는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얼마 전 내린 비 때문인지 계곡물은 유량이 제법 되었고, 곳곳에 뭉게뭉게 개구리 앞이 실려 올챙이로 깨어나려는 참이다. 샛..
2024.03.12 -
여느 때와는 다른올해 정월대보름을 보내며
[낭만파 농부] 벼농사두레 대표 6년 By 차남호 2024년 02월 29일 09:33 오전 이 얼마 만인가. 한 주 내내 겨울비가 이어지고 잔뜩 흐려 있던 하늘에 볕이 쨍하다. 다사로운 햇볕 한 줌이 그토록 소중한 시절. 어느새 잔뜩 물오른 들녘이 더욱 싱그러워 보인다. 벙근 매화 꽃망울마냥 봄기운도 저절로 부푸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에 기별을 전하는 것도 퍽 오랜만이다. 지난해 끝 무렵 ‘고산권벼농사두레’가 임기만료에 따른 임원선거 국면에 접어들면서 글을 쓸 엄두를 내기 어려운 탓이었다. 내가 대표를 맡았던 지난 6년을 갈무리하는 일도 그랬거니와 후보로 선뜻 나서는 이들이 적어 애를 먹어야 했다. 다행히 훌륭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이들로 새 집행부가 들어서 홀가분하게 짐을 넘겨줄 수 있었다. 그..
2024.03.09 -
유장한 세월
겨르로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고산권벼농사두레 대표라는, 나름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지 달포 남짓. 때마침 농한기를 만나 바쁠 일도 없으니 그야말로 유유자적, 하루하루가 느긋하다. 불현듯 ‘이리 태평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밀려들기도 한다. 왜 안 그렇겠나. 여느 해 같으면 준비하고 진행하느라 바삐 움직일 때 아니던가. 몇 차례 기획 회의에, 강사 섭외에 눈코 뜰 새가 없었을 즈음이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집행부가 올해는 강좌를 쉬어가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설령 지속하기로 방향을 정했더라도 거기 내가 끼어들 일은 없다. 농한기강좌를 열지 않는 대신 조촐히 정월대보름 잔치를 벌이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그 준비작업 또한 내가 맡을 몫은 없다. 그런데도 문득문득 조바심이 이는 건 그동안 몸에 밴 ‘관성..
2024.02.16 -
새 출발, 벼두레를 위하여
지난 1월13일 고산권벼농사두레 2024년 정기총회가 열렸다. 정기총회는 한 해 활동을 갈무리하고 새로운 활동계획을 세우는 연례행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올해 벼두레 정기총회는 여느 해와 달리 무척 뜻깊은 마당을 이루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집행부가 탄생했다. 지난 6년 동안 3연임으로 대표를 맡아온 내가 회원의 한 사람으로 물러선 것을 비롯해 집행체계가 새롭게 물갈이 되었다. 나름으로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가 열린 셈이다. 돌이켜보면 벼두레의 태동은 9년 전, 2014년 12월 2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포트모 시스템’으로 유기농 벼농사를 짓고 있거나 뜻을 품고 있던 예닐곱이 모였더랬다. 게 중에는 나처럼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짓는 이와 시골 사는 맛을 더하려 농사를 짓는 이(우스개 삼아 ..
2024.01.14 -
벼두레 @ 겨울바다
봄비 같은 겨울비가 내린다. 바깥 날씨가 포근하기까지 하다. 안 그래도 겨울잠 자던 개구리가 깨어나 알을 낳았다는 둥, 어디에서는 매화가 꽃을 피웠다는 둥 어리둥절한 소식이 전해지던 터다. 이렇게 지구가 더워지다가 결국은 종말에 이르겠거니 생각하면 가슴이 못내 서늘해진다. 엊그제도 그랬다. 변산반도 모항 해변, 벼농사두레 회원엠티를 다녀왔다. 허름한 옷차림으로 백사장에서 활개를 치다가 야외테이블에서 음료와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씻어낼 만큼 날씨가 푹했다. 다들 기후위기를 걱정하던 끝에 누군가 “그래도 엠티 날짜 하나는 기막히게 잘 잡았다”고 하자 너나없이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엠티라는 게 이름 그대로 회원 사이의 친목을 다지면서도 주요현안을 깊이 있게 의논하는 자리 아니던가. ..
2023.12.12 -
월여산 산행을 다녀오고
[낭만파 농부] 농한기의 일탈 계획 By 차남호 2023년 11월 27일 04:09 오후 뒷산을 오르는 발걸음이 무겁다. 첫 오르막부터 허벅다리가 뻐근해 오니 말이다. 어제 등산모임 ‘사니조아’를 따라 해발 8백 미터 넘는 월여산을 타고 온 후유증이겠다. 벼농사가 얼추 끝물에 접어드는 초가을부터 운동 삼아 매일 뒷산을 타는데 사니조아 등산에는 달포에 한 번 남짓 함께 하는 편이다. 물론 농사철에는 마음을 내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농사일만으로도 몸뚱이가 너무 버거운 까닭이다. 일이 할랑해지고 농한기에 들어서야 건강을 챙기는 일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된다. 별일 없으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뒷산을 오르고 등산모임에도 따라 나서는 것이다. 어제는 당일치기 산행이라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약속시간을 넘겨..
2023.11.28 -
햅쌀로 지은 '광란의 밥'
이틀 내리 세찬 바람이 불었다. 굵은 빗줄기까지 함께 내리쳤다. 그 바람에 비닐하우스 위에 똬리를 튼 등나무 덩굴이 훌러덩 벗겨져 거꾸로 처박혔다. 담벼락을 타고 오른 담쟁이, 얼마 남지 않았던 이파리마저 죄다 떨어져 앙상하게 덩굴만 남았다. 산과 들녘의 풍경도 사뭇 바뀌었다. 뒷산 소나무는 솔가리를 우수수 쏟아내고 활엽수는 저마다 마른 잎을 떨궈 오솔길은 다시 바스락거리기 시작했다. 비바람 그치고 나니 겨울 초입이다. 최저기온이 영하권으로 뚝 떨어지는 바람에 보일러에 서둘러 난방유를 채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앞집 지붕에 내린 허연 된서리가 맨 먼저 들어온다. 호박잎이 눅어 오그라진 지는 벌써 며칠 되었고, 새빨간 꽃을 꼿꼿이 세웠던 백일홍도 칙칙하게 빛이 바랬다. 그래도 김장배추는 끄떡없다. 고라니 ..
2023.11.13 -
살아남은 자의 슬픔
더위가 한 풀 꺾일 즈음 배추모종 한 판(100포기) 사다 심었더니 고라니라는 분께서 죄다 따먹고 뽑아 놓더라. 부아가 치밀고, 오기도 발동하여 다시 한 판을 더 사다가 심었더랬다. 한 동안 잠잠 하더니 어느 날 밤 또 기습. 그나마 열 댓 포기 남짓 살아남았는데 다시 심은 게 너무 늦었는지 김장철이 임박했는데도 저 모양이다. 이제야 속이 차기 시작했으니 어느 세월에? 모든 공감: 17여광범, 이근석 및 외 15명
2023.11.10 -
된서리 내린 아침
된서리 내린 아침, 안에 머물러도 발목이 시려 화들짝 양말 목을 당기다. 아! 난방유 채워야지... 모든 공감: 27여광범, 김지윤 및 외 25명
2023.11.09 -
가을 숲
여름엔 깊고 울창했다. 마른 잎 떨궈낸 가을 숲은 휑하다고도 메말랐다고도 할 수 있겠다마는 차라리 푸근하구나 오솔길을 걸어보라. 푹푹푹 빨간구두 아가씨 똑똑똑 구두소리 어림없지. 세찬 바람 불어와 너른 잎은 날아가고 솔가리 쌓여 황금빛 굽이 치네. 그 길 위에 가을 숲은 휑하고 메말랐어도 짐짓 꿋꿋하게 서 있다.
2023.11.08 -
가을걷이는 끝을 맺고
[낭만파 농부] 햅쌀밥, 설렘과 행복 By 차남호 2023년 10월 31일 03:57 오후 가을걷이를 모두 끝냈다. 올해는 콤바인(수확기계) 작업을 대행해 준 장 선생이 우리 벼두레를 깍듯이 배려해준 덕분에 지난해보다 일찌감치 마무리됐다. 짐짓 홀가분하지만 그렇다고 ‘수확의 기쁨’까지 가벼워진 건 아니다. ‘첫수확’의 설렘을 안고, 벼이삭 넘실대는 논배미를 배경 삼거나 그 안에 훌렁 뛰어들어 기념사진을 찍기에 바쁘던 시절이 있었다. 벼포기를 꽃다발 삼아 졸업노래 가락에 맞춰 “빛나는 햇나락을 터신 언니께…” 흥얼대던 해도 있었지. 풍요로워진 마음에 새참 거리를 바리바리 싸들고 오던 정겨운 모습도. 그러던 이들에게 차츰 농사 연륜이 쌓이면서 가을걷이 풍경도 더러 바뀌게 마련이다. 연륜은 능력을 키우고 안정..
2023.11.04 -
가을 환상곡
마침내 가을이다. 날씨라는 게 시나브로 바뀌는지라 몸은 이미 이 새로운 계절에 길이 들었지만 지난 여름은 무척 더웠더랬다. 덥지 않은 여름이 어디 있으랴만 되돌아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굳이 뒤를 돌아 무더위를 불러오는 까닭은 찬 바람이 불어도 이 지구는 계속 뜨거워지고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아무튼 가을이다. 가을은 하늘이다. 올해는 하늘빛이 여느 해보다 눈부시진 않지만 그래도 높고 파랗긴 매한가지. 하도 맑아서 손을 높이 벋어 손가락으로 살짝 찍으면 동그란 물결이 번져갈 것만 같다. 뭉게구름이라도 하나 둘 둥둥 떠 있으면 그것으로 가을 정취는 완성. 그 하늘 아래로는 황금빛 물결이다. 바로 이맘때, 열흘 남짓만 반짝 누릴 수 있는 눈부신 빛깔. 저 파란 하늘과 황금빛 들녘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
2023.10.16 -
기후위기에도가을과 추석은 돌아온다
[낭만파 농부] 기후정의행진 참여 By 차남호 2023년 09월 26일 11:10 오전 날씨가 선선해졌다. 밤이슬이 내리면 제법 쌀쌀하다. 여름내 열어뒀던 창문을 닫아걸고 긴팔옷을 걸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추석이 내일모레. ‘극한’이란 수식어까지 붙은 폭염과 폭우에 시달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계절이 바뀌고 있다. 역시 자연의 섭리란 거스를 수 없는 모양… 이라고 쓰려다가 화들짝 놀란다. 그 섭리라는 게 무너지고 있지 않은가. ‘온난화’의 경지를 넘어 ‘열대화’로 접어든 지구의 현실 말이다. 날이 선선해지다가 쌀쌀해지고, 이내 추워지다가 끝내 눈보라가 몰아치더라도 파국으로 치닫는 기후위기를 결코 잊지 말아야겠다고. 그래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었을 게다. 지난 주말 ‘923기후정의행진’에 함께 하려..
2023.09.28 -
잔치 인생
잔치는 끝났다. 비봉 돼지농장 완전해결 축하잔지.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3백 명을 웃도는 주민과 손님이 실내 게이트볼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비봉면 풍물패가 흥겨운 가락으로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고, 그 동안의 경과를 보고하고 소회를 나누는 간략한 의식에 이어 잔치음식을 나눴다. 두어 시간의 짧은 마당이었지만 준비하는 데는 십 수명이 꼬박 한 달을 매달려야 했다. 덕분에 별다른 말썽 없이 뜨거운 분위기에서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를 표제를 단 경과보고서를 발간해 돼지농장 재가동을 막아낸 그 지난한 과정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 뿌듯하다. 이리하여 이지반사(이지바이오 돼지농장 재가동을 반대하는 완주사람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 자리를 빌어 이 큰 잔치를 준비하느라 애써준 이지반사 집행위원..
2023.09.13 -
촌구석에 산다고 얕보지 마라
살아가는 이야기 https://www.sbook.co.kr/read?tpf=board/view&board_code=15&code=4125 촌구석에 산다고 얕보지 마라 차남호/ 전북 완주 사는 농사꾼 잔치를 벌이기로 했다. 생일잔치? 칠순 잔치? 이런 거 아니다. 면 단위, 아니 군 단위를 아우르는 그야말로 크~은 잔치다. 돼지 1만 2천 마리를 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돈장을 막아 냈는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으리오. 약칭 ‘이지반사’라고, 그 잔치가 끝날 즈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조직이 있다. 약칭을 풀면 ‘이지바이오 돼지농장 재가동을 반대하는 완주 사람들’이 된다. 돼지농장이 들어선 전북 완주군 비봉면 봉산리 다섯 마을과 그 인근의 초중고 학부모회, 협동조합과 독서 모임 등 다양한 주민단체..
2023.09.08 -
장마·폭염 이겨낸 벼 이삭
[낭만파 농부] 돼지농장 해결 잔치 By 차남호 2023년 08월 25일 09:39 오전 ‘올해 마지막 쌀’. 소비자한테 택배 보낼 때 동봉하는 안내문 제목이 오늘부터 바뀌었다. 다음달, 그러니까 9월 중순께가 되면 준비한 쌀이 얼추 소진될 듯하다. 다른 해와 견주어 일찌감치 장을 마감하는 셈이 된다. 올해 초만 해도 쌀 주문이 심상치가 않았더랬다. 끝내 남아돌까 걱정이 되어 생각다 못해 ‘맛있게 드시고 주변에 널리 홍보 부탁드린다’는 내용을 택배발송 안내문에 덧붙여 보냈다. 그런다고 문제가 풀릴까마는 지푸라기라도 부여잡는 심정이었던 것. 그 소식을 전해들은 벼농사두레 도반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리저리 선이 닿는 대로 판매를 주선해준 ‘구원의 손길’ 덕분에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그 마음 씀씀이..
2023.08.25 -
견뎌낸 자의 '논둑길 산책'
마음을 졸이게 했던 제6호 태풍 ‘카눈’이 이 고장을 스쳐 지나갔다. 느린 속도로 한반도 내륙을 관통해 내일쯤 소멸될 거란 소식이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큰 피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다행이다. 이번 태풍이 아니라도 이번 여름은 ‘미쳐 날뛰는’ 극한기후에 치여 온통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극한폭우를 동반한 장마가 한 달 가까이 반도를 할퀴어 커다란 생채기를 남겼더랬다. 장마가 끝나자 이번에는 연일 35도를 넘나드는 극한폭염이 보름 가까이 이어졌다. 날이면 날마다, 아침나절부터 푹푹 쪄대니 당최 견딜 재간이 없었다. 태풍이 몰고 온 빗줄기가 열기를 가라앉혀준 덕분에 그나마 한숨을 돌리고 있다. 마침 입춘도 지났고 하니 그 여세를 몰아 무더위가 한풀 꺾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실로 일상이 멈춰버린..
2023.08.11 -
장마통에 쓸려간 것들
[낭만파 농부] 폭우 폭염 이어지고 By 차남호 2023년 07월 31일 09:15 오전 [알림] 양력백중놀이를 취소합니다 이번 주 말 진행할 예정이던 벼두레 주최 2023년 양력백중놀이를 전면 취소합니다. 오랜만에 햇볕이 쨍하고, 날씨가 쾌청한데 어인 일인가 의아하실 분이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일기예보에 따르면 오늘과 내일 반짝 갰던 날씨는 주말을 앞두고 다시 장맛비가 이어진다고 합니다. 굵은 빗줄기 속에서, 그리고 물이 불어난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는 건 몹시 위험하지요. 아울러 전국을 강타한 극한폭우로 많은 이재민과 인명피해가 발생한 상황이라 다들 무척 심란하다는 점도 감안했습니다. 더러 아쉽더라도 이 점 깊이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조만간 다른 멋진 프로그램으로 아쉬움을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
2023.08.10 -
비봉 돼지농장 분쟁,드디어 주민 승리로 끝나
[낭만파 농부] 큰 잔치 벌이고 싶어 By 차남호 2023년 06월 27일 06:46 오후 모내기 하고 보름이 되어간다. 볏모가 논배미에 뿌리를 내린 지 이미 오래고 이제 식구를 늘리는 ‘새끼치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실낱같던 벼포기들은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고 몸집을 불리고 있다.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 모내기에 맞춰 비가 흠씬 내려줘야 벼의 생장뿐 아니라 잡초억제에 도움이 되는 법이다. 하지만 올해는 내내 가뭄이 이어지는 바람에 적잖은 어려움이 따랐다. 날씨가 무덥고 가물다 보니 해캄 따위 이롭지 않은 조류와 물달개비 같은 잡초가 번성하고 있다. 물론 왕우렁이를 풀어 넣어 먹어 치우도록 하고 있지만 힘에 부치는 모습이 또렷하다. 그나마 모내기를 마칠 즈음 단비 같은 소식이 전해져 시름을 덜게..
2023.07.19 -
“돼지와 함께 잔치를”
비봉 돼지농장 재가동을 둘러싸고 지역주민과 양돈업체 사이에 벌어졌던 분쟁이 최종 타결되었다. 축산재벌 계열사 부여육종이 휴면농장을 사들인 2015년 5월 이후 펼쳐진 이지반사(이지바이오 돼지농장 재가동을 반대하는 완주사람들)의 활동이 마침내 승리로 끝을 맺은 것이다. 어언 8년 세월이다. 완주군과 부여육종은 지난 6월16일 매매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농장부지는 완주군 소유가 되었고 양돈장 재가동 여지는 사라졌다. 부여육종은 곧이어 대법원에 올라 있던 ‘가축사육업 불허가 처분 취소 소송’의 상고를 취하함으로써 완주군(주민)이 승소한 1, 2심 판결이 최종 확정됐다. 이로써 농장 재가동을 둘러싼 행정, 사법절차는 지역주민들이 바라던 대로 마무리됐다. 그리하여 며칠 전 열린 이지반사 대표자회의에서는 오는 9월2일..
2023.07.19 -
'폭폭한' 모내기철
눈을 들어 산허리를 둘러보면 듬성듬성 콩고물을 뿌려놓은 듯 뭉게구름이 떠 있다. 밤꽃이다. 숱한 시인들이 ‘밤꽃 피는 6월’을 노래했지. 결코 예쁜 꽃은 아니나 저마다 사연을 담은 노래. 하지만 벼농사를 짓는 이 고장 농부들에게 6월초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만 하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모내기 철인 까닭이다. 사실 이 글 쓸 시간을 챙긴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모를 내는 일 자체도 큰일이긴 하다. 온 마을이 모내기 두레를 짜 새벽부터 저물녘까지 매달리던 시절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이앙기를 쓰는 요즘도 우리 ‘고산권벼농사두레’의 경우 꼬박 네댓새가 걸린다. 물론 이앙기를 모는 일이 녹록지는 않지만 힘을 쓰는 건 결국 기계이니 고단함으로 치자면 준비작업이 훨씬 더하다. 먼저 예초기를 돌려..
2023.06.13 -
이 아름다운 풍경을...
[낭만파 농부] 부직포 밑 볏모 얼굴 By 차남호 2023년 05월 31일 12:02 오후 ‘장미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울안 잔디마당에 붉디붉은 자태로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눈을 돌려보면 장미만이 아니다. 장미의 팔촌쯤 되는 하얀 찔레꽃부터 창포 붓꽃 데이지 금계국 수레국화 꽃양귀비…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초본과 이름들이 5월 꽃철을 수놓은 것이다. 이른 봄을 화사하게 물들였던 매화 복사 배꽃이 진 자리에 매달린 열매들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나무는 신록에서 짙은 녹음으로 하루가 다르게 우거진다. 그리하여 숲은 더욱 울창하고 깊어간다. 뻐꾸기 소쩍새 지빠귀 딱새 휘파람새 두견이… 거기 깃들어 사는 여름새들의 지저귐은 교향악처럼 울리다가 어느 순간 아련해 온다. 산자락엔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
2023.06.12 -
꿈만 같아
지나오니 꿈만 같다. 초반 모농사 공정을 무사히 마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올해 벼농사는 그 어느 해보다 마음을 졸이면서 시작했고, 내내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노심초사의 나날이었다. 지난해 모농사를 망치고 두 번 일을 해야 했던 기억 탓이다. 해오던 대로 볍씨를 걸러 냉수침종을 거쳐 못자리에 앉혔지만 끝내 싹을 틔우지 못했던 악몽 말이다. 설마 같은 실패를 되풀이할까 싶기도 했지만 그 트라우마가 워낙 깊었던 모양이다. ‘고산땅기운작목반’에서도 지난해까지는 열탕소독을 거친 볍씨를 공급해왔으나 처리 과정에서 과열을 우려한 나머지 올해는 소독작업을 각 농가에 맡겼다. 이에 따라 볍씨 담그기에서 열탕소독 공정이 늘어난 셈이 됐다. 그 작업이야 섭씨 60도에 물에 10분 동안 자맥질하면 되니 그리 부담되는 ..
2023.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