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29. 07:05ㆍ누리에 말걸기/<낭만파 농부>
올해 가을걷이가 끝났다. 안밤실-샘골-죽산-어우들로 이어진 콤바인 작업. 일주일 남짓 걸렸는데 실제 작업 날짜는 나흘. 날씨가 좋아 큰 어려움 없이 일을 마칠 수 있었다. 거둬들인 나락 가운데 일부는 물벼수매로 농협 RPC에 넘기고, 대부분은 거래하는 정미소에 맡겼다. 건조기로 말린 나락은 창고에 쌓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방아를 찧게 된다.
가을걷이를 끝내 개운하기는 한데 그다지 흥이 나지를 않았다. 흉작인 탓이다. 지난해에 견줘 얼추 10~20%는 줄어든 것 같다. 다들 그렇다고 했다. 전반적으로 흉작이라면 날씨 요인이 크게 작용했을 터다. 유난히 잦았던 가을태풍도 태풍이지만 무엇보다도 기후변화 탓이 큰 것 같다. 해가 갈수록 기온이 올라가니 ‘온대기후’에 맞춰 개발된 품종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수확량 감소로 이어지는 건 자연스런 현상이라 하겠다.
하긴 흉작이란 게 ‘농가지상사’라 할 만하고 그나마 ‘폭망’ 수준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싶다. 나아가 쌀시장이 다른 품목에 견줘 안정돼 있는 점도 그나마 다행이다. 이미 ‘싸전’을 열고 예약주문을 받고 있다. 올해로 아홉 번째. 9년에 걸쳐 짜여온 직거래 망이 있으니 이변이 없는 한 조금씩 다 팔려나갈 것이다. 과일이나 채소 따위처럼 수급 상황에 따라 ‘대박’ 날 일도, ‘쪽박’ 찰 일도 없다. 해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그만그만한 수입.
곧 첫 방아를 찧게 되는데 볍씨 넣기, 못자리 만들기, 모판 나르기에 품을 나눠준 이들에게 쌀 꾸러미 하나씩 안겨줘야지. 이번에도 ‘햅쌀밥 잔치’를 벌여야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흉작으로 씁쓸해진 입맛이 다시 살아난다.
그러나 사정이 그리 녹록치가 않다. 그 놈의 돼지농장, 그야말로 ‘블랙홀’이다. 지난 여름부터 일상을 점령하더니 당최 헤어날 수가 없다. 사실 돼지농장 재가동을 막아내기 위해 이리저리 내달리다 보니 논배미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잡초를 대충 잡았다 싶었는데 벼이삭이 팰 즈음 바깥밤실 논배미를 온통 점령한 피모가지를 보고 까무러칠 뻔 했다. 모정 배미에는 골풀이 잔뜩 절었다. 남들보다 더 흉작을 만끽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한 번 시작한 싸움이니 끝을 보아야 하지 않겠나. 업체 쪽 움직임도 만만치가 않다. 건물을 새로 지어 최신설비를 갖추겠다더니 태도가 싹 바뀌었다. 현재의 낡은 건물과 시설을 땜질해서 돼지를 키우겠다며 보수공사에 들어갔다. 조만간 공사가 끝나는 대로 축산업 허가와 돼지입식을 신청하겠단다.
그야말로 막가파식 행태가 아닐 수 없다. 돼지똥 냄새가 어디까지 퍼지고, 주민들이 얼마나 악취에 시달릴지는 알 바 아니고, 그저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얘기 아닌가. 돼지농장이 다시 돌아가면 이 곳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된다. 그러니 최신설비가 아니라 재가동 자체를 포기하고 적정한 절차를 거쳐 농장부지를 지역사회에 넘기라는 것이다. 이미 다른 글에서도 얘기한 바 있지만 그 이유를 거듭 밝히자면 이렇다.
첫째, 아무리 최신설비라도 1만 마리 넘는 돼지가 하루 40톤 넘게 쏟아내는 똥오줌을 감당하기 어렵다. 설령 그게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그에 따르는 천문학적 처리비용을 빼고 나면 남는 게 없을 텐데, 이윤논리를 거스를 기업이 있겠는가. 어쨌거나 냄새는 날 수밖에 없다.
둘째, 거대기업의 축산업진출은 지역 축산농가의 생존을 위협한다. 양돈시장을 잠식하는 문제 뿐 아니라 ‘수질오염 총량제’ ‘양분 총량제’ 같은 제도시행 과정에서 치명적인 ‘민폐’를 끼치게 돼 있다.
셋째, 기후변화로 ‘멸종위기’에 직면한 인류의 존속 위기, 그에 따른 기업의 사회적 책무에 비춰보더라도 그렇다. 가축이 내뿜는 온실가스가 차량운행으로 배출되는 그것을 크게 웃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대규모 공장식 축산 억제와 감축은 더는 늦출 수 없는 시대의 요청이다.
그래서다. 누구는 논배미도 제대로 돌보지 못해 ‘겹흉작’을 겪고, 누구는 금쪽같은 연차를 몇 번씩 내고, 누구는 가게를 비울 순 없으니 알바를 써가며 싸움에 함께 하고 있다. 그렇게 농장 앞에서 대중집회를 열고, 서울 본사 앞 상경투쟁을 다녀오고, 농장 앞에 천막을 치고 거점농성을 벌인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회의를 열어 머리를 맞대고, 자질구레한 실무를 처리하고, 군청 공무원과 드잡이를 하고.
워낙 센 놈을 만난 탓이다. 손꼽히는 농축산재벌 이지바이오. 그래도 흐물흐물 물러설 순 없는 노릇이다. 가을걷이로 바쁜 철이 끝나는 대로 우리는 다시 서울 본사로 쳐들어 갈 것이다. 이번에는 ‘끝을 보겠다’는 각오로 완강한 싸움을 펼칠 참이다. ‘신선이나 되어볼까’ 했더니 그것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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