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24. 23:09ㆍ누리에 말걸기/<낭만파 농부>
주말 이틀 밤 내리 잔치를 벌였다. 서로 다른 두 번의 잔치.
잔치 첫날은 모두가 아는 사이지만 내가 속하지는 않은 무리, 그러니까 대학 1년 선배들 동문모임이다. 1980년대 초반 신군부 정권의 엄혹한 독재에 저항하던 이들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이라 할 집회, 시위, 언론, 표현의 자유가 원천봉쇄 됐던 시대다. 정보기관원과 비밀경찰이 대학 캠퍼스에 상주하며 감시의 눈을 번뜩이던 시절이다. 투쟁방법으로는 기습시위가 유일했고 주동자는 감옥살이를 면할 수 없었다. 적극 가담자, 경우에 따라서는 단순 가담자라도 군대에 강제 징집되어 ‘녹화사업’에 시달릴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러니 활동은 살얼음판을 기듯 늘 가슴을 졸여야 했고 조직은 당연히 ‘비밀결사’였다.
지금 막 이들을 민주화투쟁의 ‘가시밭길’로 내몰았던 전두환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그 시절을 떠올릴라 치면 가누기 힘든 분노가 치밀던 때가 있었지만 어느덧 세월의 더께에 조금은 무뎌졌지 싶고, 그 시대를 떠올리는 이 순간에 불쑥 전해진 속보는 또 무슨 우연인가 싶어진다.
어쨌거나 그렇게 20대 초반을 함께 헤쳐나온 이들이 그 40주년을 기리는 자리를 후배의 시골집에서 치른 것이다. 얼마 전 시집을 내고 시인으로 등단한 이의 출판기념회가 핵심 프로그램이었다. 청춘을 투쟁에 바치고 가난한 삶을 꾸려온 이의 눈에 비친 세상, 그리고 소외된 노동 속에서 빚어낸 묵직한 시어에는 먹먹한 감동이 쓰며 있다.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꽃을 피웠지만 화제의 중심이 될 법한 그 시절의 ‘무용담’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꾸준히 친분을 다져오면서 그 얘기는 바닥이 난 모양이다. 그 대신 모임의 활동계획이나 살아가는 이야기가 차분히 오갔을 뿐이다. 그것도 세월이 흐른 탓이겠지. 자리를 내준 호스트로서 내게도 이 곳에서의 삶을 소개할 시간을 따로 배정해줬다. 어쩌면 몇 해 뒤에는 자신들의 삶이 될 수도 있으니 이것저것 시골생활에 대해 묻는 질문이 꼬리를 문다.
이튿날 아침, 속 쓰린 불편한 잠자리를 뒤로 하고 술병 그득히 쌓인 잔해를 남긴 채 이들은 밥벌이 현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60줄에 들어선 이들의 떠나는 뒷모습에서는 원래 쓸쓸함이 묻어나는 법인가?
나로서는 속을 다스리고 모자란 잠을 벌충할 틈도 없이 다시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이번엔 ‘햅쌀밥 잔치’.
해마다 거르지 않는 고산권 벼농사두레의 그해 마지막 행사다. 함께 구슬땀을 흘린 결실을 윤기 자르르 흐르는 햅쌀밥 한 공기로 나누는 자리. 올해는 연 이태 최악의 흉작 뒤 끝이라 분위기가 뒤숭숭할 만도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잔치는 잔치다.
명불허전, 황홀하기까지 한 햅쌀밥의 풍미에 다들 감탄을 연발한다. 반찬 없이도 맛있다는 햅쌀밥이지만 저마다 한 가지씩 안주 거리를 준비해왔다. 누구는 손수 팬을 가져와 전을 부쳐내고 누구는 어묵탕을, 순두부찌개를 끓여낸다. 정성스레 마련해온 먹거리로 자리가 흥청댄다.
음주가무가 빠질 수 없다. 대중음악을 하는 회원의 기타 연주가 받쳐주니 분위기 후끈 달아오른다. 흥이 오르니 기다렸다는 듯이 <바위처럼>에 맞춘 율동이 펼쳐진다. 코로나 팬데믹에 짓눌렸던 세월에 화풀이라도 하는 듯 ‘광란의 밤’이 이어지는 것이다. 누군가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를 암송했지만 좀 뜬금없기는 해도 분위기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구석이 없지 않았다. 처음으로 잔치에 참석한 이였는데 그 뒤에 커다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침이면 저마다 일터로 나가야 하는 탓에 잔치는 짧고 굵게 끝났다. 다들 아쉬운 눈빛으로 뒷정리를 한다. ‘독거노인’의 처지를 헤아리는 마음 씀씀이가 고맙기만 하다.
그렇게 잔치는 끝났다.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집구석은 적막하기만 하다. 올해 안에 이처럼 흥청거릴 일이 더는 없을 것이다.
때 맞춰 찬비가 내리고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뒷산 오솔길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이제 어쩔 수 없는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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