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6. 16:50ㆍ누리에 말걸기/<낭만파 농부>
화암사에 다녀오는 길이다. 시인 안도현이 ‘내 사랑’이라고 노래한 바로 그 절이다. 우리 집에서 북쪽으로 길을 잡아 자동차로 20분 남짓 걸리는 산 속에 자리하고 있다. 머리가 무겁거나 가슴이 답답할 때, 그저 날씨만 좋아도 무시로 산책 삼아 드나드는 곳.
아침나절,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더니 10시가 가까운 시간이다. 웬 늦잠이냐는 낭패감에 화들짝 전활 받았더니 동네친구다. 오늘 날씨가 그만인데 셋이서 화암사나 다녀오지 않겠느냐고. 잠결에도 드는 생각이 아, 그새 격조했구나. 그래, 앞뒤 잴 것도 없이 그러마고, 한 시간 뒤에 읍내 카페에서 함께 떠나자고. 전화를 끊고 생각해보니 지난 이른 봄, 얼레지 꽃 만나러 다녀온 게 마지막이었으니 뜸해도 너무 뜸했지 싶어진다.
너무 사무쳤던 것이었을까? 화암사, 곱게 늙은 그 자태는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설령 사무치지 않았더라도 화암사가 우릴 실망시켰을 리 없긴 하다. 그저 조각구름 둥둥 떠 있는 코발트빛 가을하늘이 절집을 더 아름답게 물들였을 뿐인 게지.
사실 화암사는 극락전 지붕이 하앙(下昻)식 결구구조인 것으로 이름을 얻은 절이다. 하앙이란 처마을 좀 더 길게 빼기 위해 포작(공포)과 서까래 사이에 끼워 넣은 구조물이다. 그것이 ‘국내 유일’로 확인되면서 극락전은 몇 년 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된 바 있다. 그 덕분에 관람객을 위한 화장실을 새로 짓고, 절집으로 통하는 차도를 넓히고, 경내로 이어지는 계곡길을 정비하고, 개울에 걸쳐 있던 소박한 나무다리를 번쩍이는 돌다리로 바꾸는 따위의 요란한 공사가 이이지기도 했다.
나야 그런 번다한 속세의 일보다는 손바닥만 한 터에 앉은 작은 절집이 풍기는 아취에 넋을 뺏긴 경우다. 한 뼘도 안 되는 마당을 금당 극락전과 요사체 적묵당, 강당 우화루가 둘러싸고 있는 구조다. 적묵당 툇마루에 걸터앉아 산등성이와 그 위에 걸린 하늘은 올려다보노라면 선계를 떠올리게 된다. 늘 그렇게 한없이 넋을 놓고 있다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리는 거다.
절집은 해발 480미터 야트막한 불명산 마루터기에 앉아 있다. 하여 산 아래 주차장에 차를 받쳐두고 계곡을 따라 오르도록 되어 있다. 한여름 우기에는 폭포수가 장관을 이루지만 요즘은 물이 끊겨 있고 이제 막 지기 시작한 나뭇잎이 드문드문 깔려 있다. 계곡물 졸졸거리는 그 길을 따라 사뿐사뿐 걷다 보면 찌들었던 온갖 삿된 마음이 씻겨 내리는 느낌이다.
그렇게 몇 십 분 쯤 오르다보면 그 흔한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불이문 하나 없이 덜컥 문간에 다다른다. 불목하니가 머물던 별채 옆으로, 여염집 대문보다 작은 가람 유일의 문턱을 넘게 되는 것이다.
내가 한때 SNS며, 블로그에 침이 마르도록 화암사에 찬사를 늘어놨더니만 반승반속인 벗한테서 기별이 왔다. 화암사를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만 나불거리시라. 그러다가 인간들 발길에 채여 화암사 망가지는 꼴 보려고 그러느냐.
한편으로 뜨끔했지만 다시 생각하니 꽁꽁 싸매고 아는 놈들끼리만 누리는 것도 내키지 않기는 매한가지인 거라. 어쨌거나 ‘국보 승격’ 효과까지 더해 더 번잡해졌을 법하긴 한데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휴일을 피해 평일에만 화암사를 찾는 까닭이다. 그러니 찾을 때마다 십중팔구 그야말로 ‘절간처럼’ 고요하다.
시골에 내려와 농사짓고 살면서 이른바 ‘라이프 스타일’이 많이 바뀌었는데 ‘요일 개념’이 사라진 게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직장에 매이지 않으니 평일과 주말이 따로 없는 것이다. 직장 대신에 농작물에 매여 살아가는 것이다. 작물이 인간들 생태를 감안해 평일엔 자라고, 주말엔 쉴 턱이 없다. 기르는 집짐승이 주말엔 사료를 먹지 않고 건너뛸 리도, 해충이 주말엔 먹이활동을 그만둘 리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주말 잃은 삶’이 그저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주말이 휴식과 여가를 뜻한다고 할 때, 평일에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사실 주말을 맞아 여행이라도 할라치면 어딜 가나 북적거리는 사람들에 치이기 마련이다. 모처럼 큰맘 먹고 잡은 계획을 망치기 십상이다. 그러니 주말 대신 한산한 평일에 여가를 누릴 수 있는 건 오히려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비밀을 알아챈 뒤로 나는 한사코 주말여행을 피하는 편이다. 더러 ‘주말인생’들이 우리집을 찾기도 하는데 느긋하게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누리면 되니 나쁠 것 없다.
아무튼 평일인 오늘, 화암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고요한 매무새로 우리 일행을 맞았다. 적묵당 툇마루에 걸터앉아 한참이나 푸른 가을하늘에 빠져 있었다. 그 정적을 방해하는 이가 아무도 없으니 큰 복이라 해야겠지.
지금은 그 선계를 떠나 속계로 내려와 있다. 그 흥취가 아직 남아 있지만 이젠 속계에 어울리는 생각을 하고 몸을 놀려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벨이 울려 받아보니 콤바인 부리는 건너마을 장 씨다.
“어 나여~ 내일버텀 나락 털었으면 싶은디…”
여부가 있나. 가을걷이가 시작되려는 순간이다. 논배미 옆 뚝방길 우거진 풀숲도 깎아야겠고, 나락 담을 톤백도 실어와야겠고. 아, 햅쌀 예약주문도 받아야겠네.
가을걷이 준비하느라 도랑치고 나서 달포 남짓 이어진 ‘작은 농한기’도 오늘로 끝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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