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한기 농부의 소소한 삶

2018. 1. 8. 15:12누리에 말걸기/<낭만파 농부>

[낭만파 농부] 영화, 책 그리고 숙제
    2017년 12월 22일 10: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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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한기로 접어든 지 어느덧 두 달이 가깝다. 느긋한 나날이다. 그저 편히 쉴 뿐인 ‘목적 없는 삶’이라고나 할까? 일단 그렇다고 해두자. 그러나 일(작업)이 없다고 해서 움직임(활동)도 없는 건 아니다. 사실 농한기를 지나는 요즘 나는 바삐, 그것도 아주 다채롭게 움직이고 있다.

한 동안은 입주한 지 얼마 안 되는 이웃의 집들이 잔치에 ‘찬조출연’하기 바빴다. 이게 뭔 얘긴지 싶겠지만 시골, 그것도 이제 막 자리를 잡은 이웃사촌 사이에선 자연스런 일이다. 게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연장전’이 벌어지면서 좋아도 너무 좋은 이웃임을 만천하에 드러낸 셈이 됐다. 그러기를 한 달 남짓, 새 이웃의 집들이 행진은 드디어 마감되었다.

사는 동네에 첫눈 오는 광경

그리고 지난 주말, 이번엔 노동운동을 함께 했던 오랜 벗들이 다녀갔다. 서너 해만이지 싶다. 쌓인 얘기가 많았을 건 당연하고. 동네 산사를 함께 거닐고,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였지만 회포를 풀기에 이틀은 너무 짧았다. 기차역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온 뒤에야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생각나면 언제라도 다시 보면 되지 싶지만 실상 그러지 못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서로를 이어주는 ‘끈’은 사라졌지만 옛정이라는 게 그리 간단치가 않은 법이다. 옛일을 더듬다가 터지는 박장대소가 얼마나 상쾌한지 다들 알 것이다. 까맣게 몰랐던 사연을 전해 듣노라면 가뭇없던 인연도 되살아난다. 건너건너 꼬리를 물다 보면 인연은 흘러가지 않았고 현재진행형임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어쩔 텐가, 남은 시간은 자꾸만 줄어드는데.

한편 이런저런 ‘만남’은 움츠러든 겨울날에 활기를 불어넣는 게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홀로 누리고 난 다음이다. 원래 번다한 걸 싫어하는 성미고 겨울철은 ‘동안거’가 제격이라 여겨온 터다. 비록 화두를 붙들고 큰 깨침을 구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깨달음을 얻기엔 더없이 좋은 시절이지 싶은 것이다. 유유자적, 농사철엔 엄두내기 힘든 일을 꾀하기에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지난주에는 나름 ‘미야자키 하야오 주간’이라 이름붙인 단독 ‘영화제’를 벌렸더랬다. SNS에 올라온 ‘스튜디오 지브리 30년 전시회’ 소개 기사를 보고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애니메이션 마니아는 아니지만 어찌 다들 하야오, 하야오 하는지가 궁금했던 터다.

시간에 쫓길 일 없으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하울의 움직이는 성>까지 극장영화 7편을 내리 감상했다. 물론 동영상 파일을 내려 받아 PC로 보는 방식이었다. 모니터도 제법 크고, 오디오도 그럭저럭 쓸 만해 그다지 불편을 느끼지는 못했고.

‘영화제’ 진행방식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먼저 서가에 꽂힌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책 <미야자키 하야오>(헬렌 매카시, 인디북)를 꺼냈다. 감독의 생애와 작품 세계부터 훑어본 뒤 작품 개요와 평을 읽는다. 해당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놓쳤거나 궁금한 사항을 책에서 확인하고, 주요장면을 다시 돌려본다. 이어 다음 작품의 개요와 평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이런 식으로 준비한 영화를 모두 보는 데 걸린 기간은 일주일 남짓. 물론 좋았지. 내 영화평론가도 아니고 일가견도 없으니 작품을 본 소회를 밝힐 처지는 아니고.

물론 그 일주일 내내 영화에만 몰입한 건 아니다. 주로 아침, 점심의 어정쩡한 시간대를 이용했고, 차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에는 주로 책을 읽었다. 물론 이번 농한기 전체를 꿰는 기획이 있는 건 아니다. 그 때 그 때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 편이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농사철에는 차분히 그리고 집중해서 봐야 하는 어려운 책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주로 철학, 그 가운데서도 난해하기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이 그렇다. 뒤로 미뤄두게 마련인데 그나마 읽을 엄두라도 내볼 수 있는 게 요즘 같은 농한기고, 이번에는 실제로 그러고 있다.

사실 어려운 책은 흔히 문장구조가 복잡하고 흐름이 난삽해 내용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다. 따라서 차분히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라 해도 제대로 독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게 좌절에 좌절을 거듭해 묵혀 있던 책들이 이번 농한기에는 읽혀지더라는 것이다. 우연한 기회였다. 살짝 취기가 돈 상태에서 덮어두었던 책을 꺼내들었는데 술술 내용이 들어오는 게 아닌가. 어차피 난해한 내용이니 감각적으로라도 이해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인데 특유의 ‘취중 집중력’이 그걸 뒷받침한 것 아닌가 싶다. 어쨌든 우연히 찾아낸 이 독서전술은 지금까지는 순항 중이다. 믿거나 말거나.

사실 내리 어려운 책만 볼 수는 없는 일이고, 이따금 ‘휠이 꽂히는’ 주제를 집중해서 파기도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를 보면서 ‘일본인의 사상체계’가 궁금해져 관련 주제를 다룬 책을 두루 보고 있다. 얼마 전에는 느닷없이 ‘낭만주의’에 사로잡혀 그쪽 분야를 훑기도 했고. 심지어 눈곱만치도 관심이 없었던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문학까지. <변증법적 상상력-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세계>(이종민, 전북대 출판문화원)가 그 책인데 내가 봐도 참 별일이지 싶다. 그러고 보니 우리 동네에서 열리는 이 저자의 강연(블레이크의 ‘천국과 지옥의 결혼’읽기)이 내일로 다가왔다.

이렇게 돌아보니 참 가지가지 하고 있구나 싶어진다. 그러나 그저 ‘널널’ 하지만은 않다는 데 비극이 있다. 이번 농한기가 끝나기 전에 꼭 해치워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그런데 영 그 실마리가 풀리지 않고 있다. 여유가 많다고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건 아닌 모양이다. 아무튼 나름 애쓰고 있으니 너무 애태우지 마시라, 문 대표(문 모 대통령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