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18. 17:37ㆍ누리에 말걸기/<낭만파 농부>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중
우리도 잔치를 벌였더랬다. 하지만 어수선함과 덧없음이 교차하는 이런 잔치가 아니었다. 잔치가 끝난 지 사흘이 지났지만 그 여운은 아직도 남아 있다. 이름 하여 양력 백중놀이.
해마다 이 즈음이 되면 우리 ‘고산권 벼농사두레’가 마련해온 잔치다. 올해로 벌써 네 번째. 백중,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긴 하겠지. 그런데 백중이면 백중이지 양력은 또 뭔가. 물론 전통 농업사회의 유속이니 산업사회로 접어든 지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는 ‘실화’라고 보기 어렵겠다. 하여 이 얘기는 좀 재미없지만 ‘유래와 의미’부터 살펴보는 게 좋겠지 싶다.
백중(百中)은 음력 7월 15일이다. 원래 불가의 5대 명절이고 하안거를 마치는 날이기도 해서 용맹정진 했던 스님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공양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민가에서는 맛있는 음식과 즐거운 놀이로 힘든 일을 끝낸 농부들을 위로하는 날이다. 하여 호남과 충청 일부에서는 술과 음식을 먹인다 해서 ‘술멕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통 농경사회는 벼농사가 중심이었으니 그와 연관이 깊기도 하다. 물대기도 어렵고, 효율 높은 제초법도 없을 때니 호미 한 자루 들고 세 번이나 김매기(세벌매기)를 하던 시절이다. 뜨거운 햇볕 아래 등짝이 익어가고 숨이 멎는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 호미를 씻어 걸고(호미씻이) 음주가무를 즐겼던 것이 바로 백중놀이다.
‘양력’백중놀이 또한 ‘벼농사’두레가 마련한 것이니 이런 전통에 잇닿는다. 다만 잔칫날을 달포 남짓 당겼을 뿐이다. 지금은 김매기가 두 달 씩이나 매달려야 할 만큼 고역스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개시설이 잘 갖춰 있고, 우렁이농법으로 풀을 잡으니 (음력이 아닌) 양력 7월 15일 즈음에 김매기가 마무리 되는 것이다.
놀긴 놀아야겠는데… 전통에 맞추려 한 달을 기다릴 순 없는 노릇 아닌가. 해서 우리 벼농사두레는 ‘양력’이라는 핑계를 찾아내 전통을 대신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4년, ‘음주가무’라는 핵심 전통만큼은 지켜왔다.
올해 잔치의 컨셉은 ‘물놀이가 있는 힐링’이었다. 그저 먹고 마실 수만은 없어 ‘논배미 투어’라는 이름으로 회원들이 짓는 논을 둘러보는 프로그램도 돌렸더랬다. 하지만 지구온난화 탓에 해마다 ‘폭염경보’가 내려 땡볕 아래 나서기가 어려웠다. 해서 논배미 투어는 ‘온라인’(단톡방)으로 대신하고, 가까운 계곡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갖은 한약재를 넣은 닭백숙으로 원기를 채우고, 지신밟기를 내세워 한 판 풍물도 치고, 시원한 계곡물에 풍덩. ‘벼농사 퀴즈’를 맞춰 쌀 선물도 받고, ‘행복한 시골살이’를 놓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스스로 아이들을 위한 보물찾기를 준비한 청소년까지. 실제로 벼농사를 짓는 이는 일곱이지만 이번 백중놀이에 함께 한 이는 예순 명이나 될 만큼 그야말로 ‘대성황’이었고 다들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그러니 잔치가 끝났다 하여 뒤치다꺼리며,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는 대신 “내년에는 더 즐겁게 놀자”는 기대가 만발하는 것이겠지.
이제 잔치를 함께 준비해온 이들과 저녁을 들며 ‘평가회의’ 하러 나가봐야 할 시간이다. 잔치를 끝낸 자의 뿌듯함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리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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