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에 논배미를 둘러보다

2018. 8. 17. 12:19누리에 말걸기/<낭만파 농부>

[낭만파 농부] 더위, 견딜 만하냐고?
    2018년 08월 17일 11:15 오전

입추 지난 게 언제인데 아직도 기·승·전, ‘무더위’다. 폭염경보가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아침나절부터 당최 밖으로 나설 엄두가 안 나는 날씨. 그나마 꼭 해야 될 일이 거의 없어 다행이다. 논둑 풀을 쳐줘야 하지만 그거 안 한다고 농사 망치지는 않는다. 그저 논배미를 말리면 안 되니 사나흘에 한 번 물을 대주는 일이 고작이다.

농부가 이렇듯 축 늘어져 있다고 해서 벼까지 그런 건 아니다. 이 뙤약볕은 오히려 보약이다. 이 즈음 들녘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벼 포기다. 넘실대는 그 짙푸른 물결. 앞서거니 뒤서거니 저마다 이삭을 올리고 결실 맺을 준비가 한창이다. 생명력이 넘쳐난다.

몸피만 키우다가 ‘생식생장’으로 넘어가면서 그야말로 혁명적 변화가 펼쳐지고 있다. 이삭이 생기고 자라 가루받이를 하고 나락으로 여물어가는 것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이 놀라운 탈바꿈에 “논물은 얼마나 대야 하는지” “벼 포기가 검푸른 게 좋은지, 옅어야 좋은지” “아직 이삭이 안 올라왔는데 괜찮은지” 숱한 궁금증과 걱정이 꼬리를 문다.

그래서 벼농사두레 회원들이 짓는 논배미를 둘러보며 생장상태도 확인하고, 작황도 살펴볼 겸 ‘논둑길 산책’이란 걸 하기로 했다. 광복절 휴일, 바로 어제 일이다. 태풍의 영향으로 무더위가 한풀 꺾일 줄 알고 잡은 날짜다. 게다가 한낮의 열기가 식을 저녁 즈음으로.

하지만 둘 다 빗나갔다. 기대했던 태풍이 멀찍이 도망가면서 날씨는 더 뜨거워졌고, 행사 시작을 30분 앞두고 섭씨 37도까지 치솟았다. 양산을 쓰고 걸어보니 숨이 턱턱 막혔다.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애초 경작자 모두의 논배미를 둘러보려던 것에서 한 배미로 줄였다. 날씨 탓에 참가자도 예상보다 줄어 여남은, 그러나 찜통더위를 감안하면 엄청난 열의가 아닐 수 없다.

작황을 살피고, 몇 가지 궁금증을 푼 다음 서둘러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얘기를 이어갔다. 식사가 끝나갈 즈음, 그제야 얼마 만인지 모를 소나기가 내린다. 참 폭폭한 노릇이다.

어쨌거나 올해 더위는 여러모로 정점을 찍었다는 생각이다. 최고기온 관련 기록을 거푸 갈아치운 것부터 그렇고, 기후변화를 둘러싼 사람들의 인식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앞으로는 이쯤의 더위가 예삿일이 되고, 여름철이 다섯 달로 늘어날 것이라는 따위의 끔찍한 시나리오가 꼬리를 물면서다. 주변사람들이 나타내는 반응은 여느 해와 확연히 다르다.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는 화두는 뭐니뭐니해도 에어컨이다. 전기요금 얘기도 더러 나오지만 주로는 “에어컨 없이 견딜 수 없을까?”다.

물론 이 더위를 에어컨 없이 어찌 견뎌낼 수 있겠는가. 틀면 틀수록 지구를 덥히는 역설을 모르지 않지만 당장 목숨이 위태로운 판인데 어쩔 도리가 없다. 더욱이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숲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봐야겠지. 한낮의 열기를 머금었다가 밤새 복사열을 내뿜는 열대야가 한 달 남짓 이어지고 있다니 하는 말이다.

시골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나는 여적 에어컨을 틀지 않고 있다. 그 물건을 아예 들려놓지도 않았으니 틀고 싶어도 틀 수가 없는 처지다. 하긴 버티고 버티던 앞집 다정이네도 두 손 들었다. 오늘 아침나절에 전자제품 대리점에서 에어컨을 실어와 설치하고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이 좀 복잡했다.

정말 견딜 만하냐고? 어찌 견디냐고? 그럭저럭 견디고 있지만 아직은 멀쩡하다. 무엇보다 복사열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도회지가 아닌데다 나무(경량목구조)로 집을 지어 단열 성능이 좋은 편이다. 저녁 무렵까지만 그럭저럭 버티면 한 두 시간 만에 열기가 식는다. 에어컨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어렵잖게 잠들 수 있다. 발코니에서 선풍기를 틀고 자다보면 이른 새벽에는 한기에 잠을 깨 방안으로 기어든다.

아침나절은 간밤에 열기가 누그러진 집안에서 지낸다. 바깥기온이 치솟으면서 실내가 더워지면 넓은 처마(필로티) 밑으로 자리를 옮긴다. 종일 그늘이 지는데다 바람이 잘 통해 제법 쓸 만하다. 하지만 수은주가 36도를 넘어 40도에 가까워오면 온풍기처럼 더운 바람이 불어온다. 그 쯤 되면 밤새 얼린 얼음팩으로 체온을 다스리는데 꽤 도움이 된다.

그런데 온종일 더위와 싸우면서 그렇게 널브러져 있으면 행복하냐고? 거참… 농사나 몸뚱이 세게 놀리는 일을 못한다 뿐이지 할 건 다한다.

이런저런 정보를 종합해보면 내 몸은 추위에 강하고, 더위에 취약한 북방계 유전자가 우세하다. 해서 여름만 되면 지레 겁을 집어 먹었더랬다. 그런데 이 곳 산자락으로 이사와 여름을 두 번 나보니 그럭저럭 버틸 수 있겠다는 자신감 같은 게 생겼다. 물론 가치에서 비롯되는 의지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한 시간 전부터 장대 같은 소나기가 내리고 있다. 그 빗속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다. 머잖아 가을도 올 것이다. 인류의 끝없는 욕심이 켜켜이 쌓여 지구온난화, 기후변화를 몰고 왔으니 단기대책이란 게 있을 수 없다. 다만 사정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조금씩이라도 누그러지도록 참을 수 있을 만큼 묵묵히 참아내는 게 욕심을 채워온 존재들의 도리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