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 미소시장의 놀이판

2018. 12. 24. 16:14누리에 말걸기/<낭만파 농부>

[낭만파 농부] 농한기도 1/3 지났다
    2018년 12월 24일 03:5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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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한 가지 바로잡으면서 얘기를 시작해야겠다. 지난번 칼럼에 ‘모두 훌훌 털어버리고 물처럼, 구름처럼 떠돌겠노라’ 호기를 부렸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꿈일 뿐이었다. 현실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한 번 실행에 옮기긴 했다. 그 며칠 뒤 홀연히 길을 잡아 아랫녘의 산사를 찾았다. 그러나 싸늘했다. 날씨도 마음도. 절 진입로를 걷는 내내 찬바람은 옷섶을 파고들었고, 헐벗은 큰키나무들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주책없이 말간 콧물이 흐르고. 아무 생각 없이, 거기 가면 틀림없이 뭔가 있을 거라는 어렴풋한 기대로 떠난 길이지만 잡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날 저물어 돌아오는 발길이 무겁기만 했다.

물론 떠돈다는 게 원래 그런 것이긴 하다. 뚜렷이 손에 잡히는 건 없지만 찰나의 느낌이나 깨달음은 무의식 속에 켜켜이 쌓였다가 언젠가 그 본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니까. 그래 할 수만 있다면 하는 것이지.

문제는 그럴 형편이 못 되더라는 얘기다. 추운 날씨쯤이야 그리 대수로운 게 아니다. 호기를 억누르고 차분하게 따져보니 할 일이 지천이다. 농사에서 벗어났다 뿐이지 마냥 한가한 시절은 아니더라 이 말이다.

농사 때문에 뒷전으로 미뤄둔 일이 한 둘이 아니다. 몇 년 묵은 숙제까지 있다. 게다가 어림셈으로도 밥벌이를 벌충해야 하는 형편이다. 그러니 싸돌긴 어디를 싸돈단 말인가. 그래 하릴없이 발이 묶일 밖에. 중뿔나게 뭘 해보지도 못하고 달포 남짓 동네에서 뭉그적거리다 보니 어느새 세밑이다.

지난 주말에는 읍내 미소시장에서 놀이판이 벌어졌다. 보물장이니 미소마켓이니 하여 격주마다 장을 열었더랬는데 이번엔 성탄절을 핑계로 댔다. 시장 상인들이 마련한 자리였는데, 소소한 좌판이 줄지어선 가운데 수수한 음악공연이 이어졌다.

중창단, 여성밴드… 다들 허물없이 지내는 동네이웃이다. 틈나는 대로 연습한 솜씨로 을씨년스런 시장 공기를 달구는 것이다. 더러 흥이 돋은 중장년들은 막춤으로 시장바닥을 주름잡는다. 참 아름답지 않은가.

공연은 널널하다. 공연과 공연 막간에는 여유가 넘친다. 공연을 마친 ‘뮤지션’과 박수와 환호, 춤사위로 어울렸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시장 한 켠에 차려진 술판으로. 막걸리가 몇 순배 도는 사이 공연 품평이 이어지다가 이런저런 사연들도 딸려 나온다. 나들이 삼아 시장 구경 나온 이들도 얼떨결에 이끌려 든다. 여기저기 수인사가 오가고 술잔도 넘나든다.

사실 이 술판은 하루 전에 급조된 기획이다. 그냥 공연만 보기는 맹숭맹숭하니 판을 벌여보자는 병수 형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전날 밤 행사를 치르고 남은 음식과 술에, 중국집 아들이었다는 ‘동네 셰프’ 임 박사를 꼬드겨 색다른 안주를 준비토록 하자는 것이었다. 여부가 있나.

한 동안 왁자하던 술판에서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진다. 다음 공연이 시작된단다. 관객도 서로 품앗이해야 한다며 굳이 무대 앞에 자리를 잡는다. 어쨌거나 화음을 넣은 가곡 선율이 시장통에 울려 퍼진다.

나를 비롯한 몇몇은 그냥 무시하고 꿋꿋하게 술판을 지킨다. 그제는 장구연습 뒤풀이랍시고, 어제는 동지팥죽 핑계로, 벌써 사흘째다. 게다가 오늘은 낮술. 시간 좀 된 듯하여 천막 너머로 눈길을 돌리니 아직도 해가 멀쩡하다. 저만치 내다보이는 안수산의 자태가 몽롱하다. 내가 술을 마시는지 술이 나를 마시는지…

오후 내내 네 팀이 나선 공연은 뉘엿뉘엿 해가 질 때쯤 막을 내렸다. 시장가게 앞 평상 위에 차렸던 술판도 주섬주섬 마무리됐다. 물론 그게 끝이 아님을 다들 안다. 묵은 사연은 아직도 쌓여있고 밤은 길기만 하다. 한밤중일까 하여 몇 번을 쳐다봐도 시계는 여전히 초저녁이다. 내일 당장 해치워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농한기잖아.

그러고 보니 이번 농한기도 얼떨결에 1/3이 지나갔다. 처음 그렸던 그림이 비현실 또는 초현실이었던 터라 그 대가를 치른 셈 치고, 어쨌거나 다시 그려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