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29. 10:36ㆍ누리에 말걸기/<낭만파 농부>
가을날은 쏜살처럼 빠르다. 그 빠름은 인력을 낳고 모든 걸 빨아들인다. 하여 사람들은 곧잘 ‘가을병’에 빠져든다. 미망인 게지.
문득 미망에서 깨어난 가을아침은 씁쓸하지만 한편으론 개운하기도 하다. 저기 물들어가는 산이 있고, 높고 파란 하늘이 있다. 그래 산이 산이요, 하늘은 하늘인 게지.
넋이야 있고 없고, 그새 할 건 다 하고 있었구나. 가을걷이는 벌써 반 넘어 끝냈고, ‘햅쌀 예약주문 안내’도 빠뜨리지 않았군.
“오늘부터 가을걷이 들어갑니다. 예약주문 받아요~* 말리고 찧어서 이달 하순에 공급합니다.잘 아시겠지만 농약도, 비료도 전혀 하지 않은 건강한 쌀! 자연생태를 살리는 깨끗한 쌀입니다. 게다가 밥맛 좋기로 유명한 신동진 품종!
쌀값은 4년째 동결! 최근 쌀 시장가격이 많이 올랐지만 ‘생산비에 기초한 고정가격제’ 기조를 고수하렵니다. 심지어 밥맛이 없으면 쌀값을 아예 받지 않아요^^
그런데 갈수록 ‘집밥’이 줄어 어려움이 많습니다. 널리 홍보도 해주시고, 많이 도와주십시오.”
가을 병치레 하느라고 나락 털면서 음유시인 흉내까지.
붓 한 자루 내게 주오.
흰 구름 듬뿍 찍어
저 시린 하늘에 쓰리니
이 가을 나는 시인이려오.
그리고 잘도 놀았구나. 가을걷이에 앞선 한 달 남짓의 ‘작은 농한기’.
먼저 품이 좀 들어가는 놀이. 2년 가까이 미뤄오던 정원텃밭 만들기에 나섰다. 돌멩이를 골라내고 바닥을 가지런히 고르고, 고벽돌 사다가 통행로에 깔고, 작은 연못을 파고, 잡동사니를 갈무리할 창고 대용으로 비닐집을 세우고.
다음으로 진짜 놀이 ‘황금들녘 나들이 & 풍년잔치’. 가을걷이 앞두고 우리 고산권 벼농사두레가 마련한 잔치판이다. 힘겨운 노동과 뜨거운 여름을 이기고 마침내 햇나락을 거둬들이는 기쁨을 자축하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잘 놀았다.
황금물결 일렁이는 논배미에 나가 아이들과 함께 메뚜기를 잡고, 가을풍경을 화폭에 담는 사생대회. 잡아온 메뚜기 볶아 막걸리 한 잔 걸치고 신나게 풍물 한판. 나물반찬에 저녁밥 함께 나눈 뒤 올해 벼농사 얘기 들어보고, 배꼽 빠지는 ‘동네방네 퀴즈’ 맞춰 농산물 상품도 타고, 노래방 반주에 맞춰 목이 터져라 불러도 보고.
1백명 가까운 사람들이 그렇게 한글날 하루를 흥겹게 보냈다. 내쳐 평가모임을 열어 다음부터는 여성들에게 준비부담이 집중되지 않도록 방법을 찾자, 회원이 아닌 참가자들한테는 참가비를 모금해 ‘무임승차’ 부담감도 덜고 비용도 마련하자, 말 나온 김에 온라인 대화방도 정비해서 ‘톡방 공해’ 좀 줄여보자. 이것저것 고치고 가다듬기로 했다.
이윽고 가을걷이에 들어가기 전 주말, ‘번개’를 쳤다.
[벙개] 가을… 화암사 나들이~*
단풍은 물론 아직이겠죠.
그래도 가을빛은 또렷할 거예요.
올여름 그 무더운 날들을 견뎌낸 화암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뛰어요.
계곡 숲길은 더욱 깊어졌겠지요.
건듯 불어온 바람에 풍경소리 댕댕~
함께 가요! 저 태초의 고요 속으로~
떠나기 서너 시간 앞두고 벌인 일이라 고작 예닐곱이 함께 했지만 역시 산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더랬다. 거기에 구절초 흐드러진 꽃길까지.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다시 속계에 섰다. 남은 스무 마지기 나락을 털어야 하고, 말리고 찧어서 소비자한테 보내야 한다. 아, 콤바인 조종 버벅대는 경목이 형님한테 맡겼으니 갓을 널찍하게 돌려야겠네. 낫 한 자루 들고 슬슬 나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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