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20. 11:48ㆍ누리에 말걸기/<낭만파 농부>
그 산사, 불명산 화암사에 다녀오는 길이다. 면사무소에 들러 친환경직불금을 신청하고 나오는데 바람이 어찌나 부드럽던지 저도 모르게 그 쪽으로 자동차 핸들이 꺾이는 것이다.
절집으로 통하는 산비탈과 계곡 길. 복수초에 얼레지, 한바탕 눈부신 꽃 잔치가 벌어졌다. 겨울이 따뜻해선가 지난해보다 일찍 꽃망울을 터뜨렸다. 한 포기, 한 포기 그렇게 반듯할 수가 없다. 하늘의 별무리처럼 흩뿌려진 노랗고, 불그레한 꽃무리. 어쩔 수 없는 봄이다.
뜻밖으로 절집 경내는 고요하기만 했다. 댕~댕~ 한 줄기 바람결에 울리는 풍경소리만이 전부인, 승방 적묵당(寂黙堂) 편액에 비친 절대 적요의 세계. 올라오는 길에 만난 봄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의 ‘동안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선가 수행승들의 동안거는 지난 대보름에 해제됐다. 이미 한 달이나 지났는데 나는 왜. 붙든 화두를 아직 풀지 못한 탓이다. 소요유의 경지는 멀기만 하다. 하여 오늘도 해오를 좇아 문자와 더불어 씨름하는 거지.
그렇다고 내가 무슨 돈오성불을 구하는 출세간의 구도자는 아니다. 어차피 인연의 끈을 잘라버릴 처지가 못 된다. 나아가 붙들고 있는 그 화두라는 것도 실은 속되고 속된 것이리라. 왜 안 그렇겠나. 직불금을 신청하고, 자동차보험을 갱신하고, 냉이전 안주 삼아 막걸리 잔 기울이는 구도자를 상상할 수 있을까. 더욱이 꽃놀이를 탐하는 수행자라니.
꽃놀이?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그 또한 따듯한 날씨 탓이었다. 아랫녘은 매화가 만개했다는 뉴스에 콧구멍이 벌름거린 건. 느닷없이 연통을 돌려 순천으로 길을 잡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비가 내렸다. 빗줄기가 가늘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선암매는 아직 활짝 피어나지 않았다. 꽃봉오리에 빗방울이 맺힌 우중매라니. 선암사에서 지척인 금둔사 홍매화는 활짝 피어 장관을 이루었다. 어떤 놈은 벌써 시들고 있으니 개화의 섭리라는 건 당최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 또한 기후변화가 몰고 온 현상은 아닐는지.
어쨌거나 이리 싸돌다가 어느 세월에 해오각성을 하겠다는 말인지. 사실을 말하자면 동안거는 애진작에 끝났다. 들녘이 깨어나 잔뜩 물이 오른 지 오래고, 꽃으로 뒤덮여 저리 꿈틀대는 시절에 수행이란 될 법한 얘기가 아니다. 근질근질 해지는 심신을 가눌 길은 없다. 나의 동안거는 이제 해제를 선언할 날짜를 잡는 일만 남았다. 아마도 볍씨를 담그는 날이 될 것이다. 벼농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날이다. 달포 남짓 남았다.
올해로 여덟 번째다. 농사연륜이 쌓이면서 농사철을 앞두고 일어나는 마음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처음 몇 해 동안은 어찌나 부담스럽고 긴장이 되던지. 그런 만큼이나 설레는 마음도 컸더랬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일차감정이 ‘무덤덤’으로 바뀌었다. 농사공정이야 크게 바뀌는 게 없으니 해오던 대로 하면 되고, 그때그때 달라지는 상황에 대처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정작 신경이 쓰이는 일은 두레(협동)작업 쪽이다. 우리 벼농사두레가 꾸준히 활동하면서 유기농 벼농사에 대한 회원들의 체험 욕구도 적지 않다. 이에 따라 그런 욕구를 조율하고 여건을 마련해주는 일이 중요하게 떠오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알림] 벼농사에 도전하실 분을 찾습니다.
한 달 반 뒤에는 볍씨를 담그고 농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작업공정이 90% 이상 기계화돼 있어 생각만큼 힘든 농사는 아닙니다. 한두 배미 규모라면 쉬엄쉬엄 할 수 있지요. 게다가 우리 벼농사두레는 그야말로 두레(협동)작업을 하므로 더 쉽고, 재미도 있습니다. 잘 익은 나락을 거둬들이는 보람에, 손수 지은 쌀로 밥이며 떡을 해먹는 맛도 쏠쏠하지요.
처음이라 낯설 수도 있고, 두렵기도 할 겁니다. 그래도 더불어 일손을 나누고, 함께 헤쳐 나가면 그리 어려울 게 없지요. 뜻이 있으시다면 씩씩하게 도전해 보세요.
[알림] 고산권벼농사두레 신규경작 설명회
ㅇ 언제: 3월 20일(수) 오후 7시30분
ㅇ 어디서: 네발요정 카페
ㅇ 내용: -유기농 벼농사 경작환경과 공정 -두레(협동)작업 계획 -농지(논배미) 확보방안 등
* 관심있는 분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습니다.
몇 명 또는 몇 팀이나 새로 합류할지는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누군가는 짐을 싸는 사람도 있겠지. 어찌되었든 이 또한 가닥이 잡히고 새로운 두레판이 짜일 것이다. 그렇게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농사를 시작하는 그 날까지 아직 달포 남짓 여유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 그것이 소요유가 펼쳐지는 밑바탕이라고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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