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5. 18:49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오랜만에 논배미를 한 바퀴 둘러보고 오는 길이다. 중간물떼기(뿌리 발육을 위해 산소공급 차원에서 물을 빼고 논바닥을 말리는 일)에 들어간 뒤로는 처음 발길이니 거의 열흘 만이지 싶다.
중간물떼기 국면에서 이리 오랜만에 논배미를 둘러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매일매일 살펴보면서 토질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한다. 논바닥이 갈라지고 땅이 단단해질 정도로 웬만큼 산소가 공급됐다 싶으면 다시 물을 대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올해는 그럴 기회가 아예 없었다. 모내기 이후 때 맞춰 비가 내려 가뭄을 타지 않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너무 심하다. 기록적인 집중호우로 논둑이 무너져 내린 뒤에도 장마가 지루하게 이어지면서 이따금 물난리를 치러야 했다. 엊그제는 1시간 동안 강우량 1백 미리에 이르는 그야말로 물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완주라는 이름이 ‘폭우피해’와 묶여 전국방송까지 탔다. 덕분에 가까운 친지들의 걱정스런 안부전화가 줄을 이었다. 다행히 마당에 깔아놓은 자갈이 급한 물살에 휩쓸려나가는 따위의 소소한 일 빼고 이렇다 할 피해는 겪지 않았다.
논배미로 말하자면 설령 불어난 물에 벼가 잠긴다 한들 농부가 뛰어들어 해볼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될 대로 되라지!’ 하고 내쳐두거나 어서 비가 그치고 물이 빠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일밖에.
그렇게 조바심치며 열흘 만에 둘러본 논배미는 걱정했던 것보다는 멀쩡했다. 물살에 떠내려온 토사와 검불 따위가 덮친 곳이 몇 군데 있었지만 크게 문제될 수준은 아니다. 걱정스럽던 논둑도 더는 무너진 곳이 없는 듯하다.
문제는 논바닥. 오랜 장마의 뒤끝인지라 아직도 흥건하게 물이 고여 있다. 쩍쩍 갈라지고 물기가 사라졌어야 할 판국에. 하지만 어쩌랴. 내리는 비를 막을 길도 없고, 헤어 드라이기로 말릴 수도 없는 노릇.
그나마 못 보던 사이에 벼 포기는 훌쩍 자랐고, 새끼를 쳐서 한결 무성해졌다. 벼줄기 몇 대를 표본으로 채취해 해부를 해봤다. 이삭이 맺히는 끝마디 위에 보일 듯 말 듯 명주실 실밥처럼 생긴 유수(幼穗, 원시이삭)가 붙어 있다. 이른바 유수형성기. 몸집을 키우는 영양생장 단계를 지나 이삭을 준비하는 생식생장 단계로 들어섰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벼농사를 시작하고 석 달이 흘렀다. 전반기가 끝나고 후반기인 셈이다. 벼는 앞으로 막 생겨난 유수를 이삭으로 키워 올릴 것이다. 이삭이 패고, 수정을 하고, 전분을 만들어내 마침내 나락을 맺을 것이다. 이를 위해 다시 한 동안 흠씬 물을 대줘야 한다. 벼는 이 물을 끌어올리고 햇빛을 받아 탄소동화작용으로 이삭을 살찌우게 된다. 이제 무엇보다 햇빛이 아쉬운 국면이다.
하지만 오늘 저녁뉴스는 중부지방 집중호우에 따른 끔찍한 피해소식을 잇따라 내보내고 있다. 산사태로 집채가 무너지고, 도로가 끊기고, 저수지 둑이 무너져 온 마을이 잠기고 쓸려가고... 게다가 앞으로도 비가 많이 내릴 거라는 예보를 덧붙이다.
어림셈으로도 장마가 달포 넘게 이어지고 있다. 심란하기만 하다. 이젠 하늘을 원망할 염치도 없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불러들인 재앙이기 때문이다. 거듭된 경고에도 욕망을 억누르지 못한 채 자연생태를 파괴하고 기후위기를 불러온 인류의 자업자득.
8월로 접어든 지금까지 지독한 폭염도, 열대야도 없었던 올여름. 밤공기는 선선하지만 마음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월간 <완두콩> 2020년 8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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