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28. 10:20ㆍ누리에 말걸기/<낭만파 농부>
[낭만파 농부] 새털구름이 가득하다
By 차남호
2021년 01월 28일 09:05 오전
“딸랑 딸랑”
등산화에 매달린 방울 소리가 참 청아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 발길에 맞춰 가지런히 울리니 리듬감이 생기는 듯도 하고, 허공을 가르는 또렷한 소리파장 덕분에 잡생각이 달아나는 것도 같다. 이렇듯 방울 소리 들으며 뒷산 오솔길을 거닐어 온지 이제 달포가 되어간다. 난데없이 어인 방울이냐고?
누군가는 남명 조식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조 영남유학의 양대산맥을 이룬 산림처사. 대쪽 같은 기개와 지독한 자기절제로 유명했던 남명은 늘 깨어있는 삶을 살고자 품에는 경의검(敬義劍)이라는 장도를, 옷고름에는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차고 다녔다 전해진다. 성성자는 걸을 때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려는 뜻이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방울소리가 그런 구실을 할 수도 있겠거니 싶다만, 나의 방울은 사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난번에 얘기했듯이 달포 전 산행 길에서 멧돼지 떼를 만나 가슴을 쓸어내렸더랬다. 그 얘기를 이웃들에게 일러줬더니 그 가운데 방울을 해결책으로 권하는 이가 있었다. 멧돼지들은 귀가 밝아 멀리서도 방울소리를 듣고 지레 먼저 피한다는 얘기였다. 하긴 아무리 집채만 한 멧돼지라도 낯선 문명의 소리를 감당하긴 어렵겠지 싶어 바로 실행에 옮겼는데 그 뒤론 여적 멧돼지와 마주치지 않은 걸 보면 확실히 효험이 있는 듯 싶다.
그런데 야릇한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이 방울이 성성자 효과를 내고 있다는 거다. 처음엔 낯선 딸랑거림이 무척이나 귀에 거슬렸더랬다. 하지만 그 소리가 차차 귀에 익고 리듬감까지 생기고 나서부터는 되레 울타리 또는 균형자 노릇을 하더라는 얘기다. 물론 산행 중 사색의 울타리요 성찰의 균형자를 뜻함이다. 잡생각이 떠오르고 무질서하게 생각이 흐트러질라 치면 울리는 경종이랄까.
이래저래 속 시끄러운 시절이다. 팬데믹으로 몇 달 째 몸뚱이가 묶여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네, 5인 이상 집합금지 명령이네 하여 나 같은 농한기 농사꾼들은 하릴없이 고립무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다. 할 일을 못하는 게 가장 크다. 우리 벼농사두레는 이 와중에 속절없이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다. 송년모임을 건너뛴 거야 그렇다 치고, 새해 첫머리에 바닷바람 쐬며 한 해를 구상하던 연찬모임(엠티)도 결국 떠나지 못했다. 휴지기를 배움과 토론으로 채우던, 여느 해 같으면 지금 한창 열기를 내뿜고 있을 <농한기강좌>도 열지 못했다. 이러다가는 이태 째 정기총회마저 기약할 수 없는 처지다. 그 생동감 넘치는 얘깃거리가 사라진 것도 커다란 아쉬움 중의 하나다.
어쨌거나 기나긴 침잠. 가라앉으면 생각이 많아지고 깊어지는 모양이다. 어찌 보면 병통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살아온 날은 갈수록 아득해지고 남은 날, 적멸은 가까워오니 어쩌면 갈 길 바쁜 처지다. 이제 삶의 본질, 궁극의 가치를 성찰하기에도 빠듯한 세월이다. 스러질 시간이 멀지 않았으니 세계와 삶의 이치를 온전히 깨닫고자 하는 조바심이랄까.
그러나 사바세계의 질긴 인연과 모진 현실은 이 하찮은 탐구욕마저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다. 나무는 가만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듯 말이다. 무엇보다 정치현안을 둘러싼 진영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이 사회 거의 전부를 빨아들이지 않았던가. 그 진영에서 벗어난 지 오래인 나로서는 이 상황이 몹시도 거북하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명제가 아니라도 삶이란 정치와 떼어놓을 수 없고, 저마다 첫손에 꼽는 가치임을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생망’, 투쟁현장에서 지난 반평생을 보내오면서 나는 내 정치적 지향이 가망 없는 초현실임을, 아무리 버둥거려도 이번 생애에서는 이룰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던 터다. 그리하여 손을 털고, 마음을 털었더랬다. 그런데 왜. 아직도 미련이 남아서?
아무리 초탈하려 해도 아직 선계에 들지 못하고 속계에 발 딛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점이 있다. 함께 부대끼는 사람들, ‘동료시민’을 모른 체 할 수 없는 일이고 나 또한 투명인간일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나서 입방아 찧을 일은 아니로되 울안에 떠오른 다른 목소리까지 모른 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속을 버선목처럼 뒤집어 보일 수밖에. 설령 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는 거다. 어차피 ‘이생망’ 아니던가.
방울소리는 멧돼지에게 저희들 말고 다른 목숨붙이가 존재함을 알리는 신호다. 그 개체를 들이박아 해치는 대신 거리를 두고 공생하자는 신호. 총포 따위로 목숨을 거두는 대신에 평화롭게 공존하겠다는 신호. 세상살이란 게, 정치라는 게 ‘너 죽고 나 살자’고 달려들 일은 아니지 않는가 이 말이다. 하나의 울림이 그대로 존중되는 가운데 또 다른 울림을 불러 끝없이 울려 퍼지는 세상은 정녕 헛된 꿈이런가.
산행길에 올려다본 하늘이 새털구름으로 가득하다. 문득 새털처럼 가볍게 살 순 없을까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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