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둣빛 뒷산, 다시 농사철

2021. 4. 22. 15:57누리에 말걸기/<낭만파 농부>

[낭만파 농부] 벼농사두레의 도반들

By 차남호

    2021년 04월 21일 09:32 오전

 

 

세상이 온통 연둣빛으로 물들고 있다. 지난 달포 어간, 먼 산자락은 점점이 박힌 파스텔 톤의 연분홍빛으로 넘실대던 터다. 이제 돋아난 새순이 잎으로 피어나면서 들녘의 색감도 바뀌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둔갑술이다. 날마다 오르는 뒷산의 풍광 또한 하루가 다르게 표변하고 있다. 낙엽이 지고부터 겨울을 나는 동안 산은 내내 칙칙한 빛이었다. 그 지루한 정경은 겨우내 바뀌지 않았다. 봄꽃들이 저마다 앞다퉈 피어오를 때까지.

연두 빛 속에 핀 철쭉

숲의 주인공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간다. 진달래와 산벚꽃은 이제 말끔히 자취를 감추었고 다채로운 빛깔의 철쭉 무리가 여기저기서 그 무르익은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하지만 점점이 박혔을 뿐 숲을 지배하는 빛은 다름 아닌 연두다. 숨가쁘게 펼쳐지는 이 대자연의 조화는 어릿어릿 황홀하기까지 하다.

눈만 부신 게 아니다. 숲은 그 변신의 부산물로 특별한 선물을 내놓기도 한다. 두릅나무, 엄나무 따위 돋아나는 새순은 이 계절에만 맛볼 수 있는 별미이기도 하다.

이렇듯 달라지는 자연에 발맞추어 인간세계도 변화를 꾀한다. 특히나 자연에 기대어 살아가는 농사꾼 세계의 맞춤한 움직임은 거의 본능적이다. 마침내 농사철이 펼쳐지는 것이다.

얼마 전 우리 ‘고산권 벼농사두레’ 정기총회가 열렸다. 해마다 으레껏 진행하는, 지난 한해를 결산하고 다가올 한해를 구상하는 자리다. 다만 늘 농사철을 코앞에 두고 열린다는 점을 눈여겨볼 일이다. 한해 농사를 다시 시작한다는 신호를 두레 구성원 모두에게 보내고, 다함께 기지개를 펴는 일종의 통과의례인 셈이다.

그 점에서 정해진 사무적 절차보다는 일체감을 확인하고 두레의 가치를 함께 나누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니 회의는 짧게, 나눔은 길게. 막걸리 동아리 ‘막동이’가 이름값을 단단히 했다. 이번에는 석탄주를 빚어냈다. 멥쌀에 찹쌀을 더해 만든 술로, 그 맛이 좋아 차마 삼키기가 아깝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술이 익기까지 보름 남짓 들인 정성으로 하여 화기애애한 정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렇게 돋우어진 신명을 다시 단체 줄넘기로 풀어내며 힘껏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다시 확산세를 보이던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해 잔디마당에서 행사를 진행하면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정기총회에서 줄넘기를

정기총회로 기지개를 폈으니 이제 계획에 따라 실행해나가면 된다. 먼저 경작자 회의부터. 실제 벼농사를 지을 이들로 진용을 갖추고 작업일정을 짜는 과정이다. 지난해에 견주어 경작자와 면적이 조금 줄었다. 논배미를 다시 나누고 새로 바뀐 작업 여건을 점검했다. 이어 볍씨 담그기-기계파종-못자리 만들기로 이어지는 초반작업 일정도 확정했다. 지난해보다 나빠진 점도 있고 중요한 변수가 생기기도 했다.

경작자 회의

나로서는 귀농하고 나서 열 번째 벼농사다. 농작업 내용이야 소소한 몇 가지를 빼고는 빤하다. 그에 따라 해가 갈수록 농사를 앞둔 긴장감도 줄어들게 마련이고 그만큼 덤덤해진 것도 사실이다. 농사 또한 ‘밥벌이’라는 점에서 새삼스레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일은 아닌 게 사실이다. 나아가 꼭 일일신 우일신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래도 함께 하는 스무 명 남짓 벼농사두레 ‘도반’이 있어 그 빤한 농사가 지루하지 않고 늘 생기가 넘칠 수 있다. 단지 두레(협동) 작업으로 일손을 나눌 수 있어서만은 아니다. ‘기계화 영농’ 시대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뜻이 깊지만 우리 두레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생태농사의 가치와 철학을 함께 나누고 배운다. 이에 바탕을 두지 않는 농사는 자연에 부담을 주고 해침으로써 이득을 챙기는 여느 돈벌이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마흔에 이르는 또 다른 이들이 몸소 논배미를 부치지는 않으면서도 두레와 함께 하는 까닭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함께 나누고 누릴 숱한 ‘핑계’가 필요한 것이다. 혼자만 잘 사는 게 아니라 모두가 행복한 삶 말이다.

전통적인 농촌공동체가 무너진 지 이미 오래다. 벼농사를 끈으로 펼쳐지는 두레의 활동에서는 그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저 복고 취향이 아니라 사람냄새 나는 삶을 꿈꾼다는 점에서 이제 7년째로 접어든 두레의 앞길에 사뭇 설레는 것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