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13. 17:14ㆍ누리에 말걸기/<작은책>
방아를 찧었다. 엉덩방아가 아닌 진짜 쌀 방아. 1톤 트럭에 실은 쌀자루 무게에 짐칸이 휘청거린다. 물론 그 많은 쌀, 우리식구가 다 먹을 순 없다. 이래봬도 1만평 농사, 내다 팔려고 찧은 거다.
그것 참 ‘폭폭헌’ 노릇이다. 시방 방아나 찧고 있을 때가 아닌디... 지난해까지만 해도 가을걷이와 함께 문을 열었던 ‘싸전’은 이듬해 4월이면 탈탈 털고 문을 닫았다. 곧이어 가뿐한 마음으로 새로 벼농사 시작. 그러나 올해는 전혀 가뿐하지가 않다. 벼농사는 시작됐는데, 싸전에는 아직 찧지도 않은 나락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해마다 ‘의무수입물량’을 40만 톤 넘게 들여오는 데다 기록적인 대풍까지 더해 그야말로 ‘쌀 사태’가 났으니 그럴 밖에.
날씨도 부담이다. 기후변화 탓이겠지만 이제 5월만 돼도 ‘계절의 여왕’에 어울리지 않게 기온이 치솟아 쌀을 간수하는 데는 여간 불리하지 않다. 생각 끝에, 여름철이 끝날 때까지는 미리 주문을 받아 갓 찧은 쌀을 대주기로 했다. 신선도를 최대한 확보하자는 것이다. 오늘 방아를 찧은 사연은 이렇다.
사람들은 알까? 한편에서는 거둬들인 지 반년 넘은 나락을 찧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나락을 볍씨로 싹을 틔워 기르는 농사꾼의 복잡한 심사를. 아무튼 지금 안밤실에 마련한 못자리에는 볏모가 뾰족뾰족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한 달 남짓한 ‘모 농사’가 시작된 것이다.
‘모 농사가 반(半)농사’라 했다. 반년에 이르는 벼농사 기간의 1/6밖에 안 되지만 비중은 절반에 이를 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좋은 볍씨를 골라 눈을 틔우고, 안정된 보금자리에 앉혀 잘 보살펴야 튼실한 모를 얻을 수 있다. 사람의 유년 건강관리와 다를 바 없다.
모 농사는 지난번(2015년 11월호)에 다룬 바 있는 벼농사모임이 함께 짓는다. 새해 들어 넉 달 남짓 격주로 ‘농한기 강좌’를 열어 나름 ‘열공’을 해온 터다. 이를 통해 여섯 집(팀)이 한 배미 씩 맡아 새로 벼농사에 입문했다. 고작 두어 마지기(4백~6백 평)씩 지어봤자 자가식량 하고 가까운 지인들한테 나눠주면 땡이다. 그래도 처음 ‘내 농사’를 짓는 마음이 예사로울 수 없다. 벅차기도 하고 한편으론 이것저것 걱정스럽기도 할 게다.
이들을 포함한 열두 집(팀)의 벼농사 첫 공정은 지난 4월말 볍씨 담그기. 온종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수돗가가 복작거렸다.먼저 염수선(鹽水選). 소금을 물에 풀어 비중을 높인 다음 볍씨를 쏟아 넣으면 알찬 놈은 가라앉고 쭉정이는 위로 뜬다. 쭉정이를 떠내고, 알찬 볍씨만 골라 열탕소독을 한다. 시판제품 소독기를 쓰는데, 섭씨 60도로 데운 물에 10분 동안 침지한다. 다음 차례는 냉수침종(冷水浸種). 볍씨를 망자루에 넣어 낮 시간에는 찬물에 담가두고 밤 시간엔 건져놓기를 거듭한다. 이렇게 닷새 쯤 지나면 볍씨에 눈(싹과 뿌리)이 트인다. 이렇게 씨 뿌릴 준비가 끝났다.
손으로 모를 내던 시절에는 볍씨를 못자리에 바로 뿌렸더랬다. 이앙기로 모를 심게 되면서는 모판에 뿌린다. ‘포트모 시스템’인 우리는 파종기계를 써서 볍씨를 넣는다. 모판에 볍씨와 상토를 넣는 작업은 기계가 해준다. 그러나 기계에 볍씨와 상토, 모판을 공급하는 일과 모판을 날라다 쌓고 물을 뿌려 비닐을 덮는 일 따위는 죄 사람 손을 거쳐야 한다.
벼농사모임이 짓는 면적이 모두 2만평을 웃도니 파종작업만도 이틀이 걸렸다. 첫날은 그야말로 화창한 봄날, 소풍 나온 듯 작업을 마쳤다. 그러나 다음날엔 날씨가 돌변해 일하는 내내 세찬 비바람이 몰아쳤다. 상토가루가 날리고, 비닐이 펄럭이고, 모판이 뒤집어지고... 악전고투에 빗물에 옷이 젖어 겨울을 만난 듯 몸을 떨어야 했다. 마치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느낌. 새참과 점심시간에는 잠시 웃음이 도는가 싶더니만 끝내 험한 날씨를 넘어서진 못했다.
이제 마지막, 모판을 못자리에 앉히는 일이 남았다. 언젠가 또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기계화가 벼농사 풍경을 크게 바꿔 놓았다. 벼농사 하면 흔히 모내기와 벼베기, 마치 동네잔치같이 북적대고 흥청거리는 그림을 떠올리는데 이게 다 옛말이라는 거다.요즘 모내기와 가을걷이는 이앙기와 콤바인을 조작하는 사람과 보조인력 두엇이 해치운다. 싱겁다 못해 썰렁하기 이를 데 없다.
그나마 우리처럼 여럿이 함께 넓은 못자리를 만들다보면 벼농사의 흥이 살아난다. 2천5백 개나 되는 모판을 앉히려면 한꺼번에 많은 인력이 필요하니 판이 커지는 건 당연하다. 올해는 그날이 5월 7일.
못자리에 고랑을 내고 두둑을 고른 다음 그물망을 깔고 그 위에 모판을 얹는 게 이 작업의 얼개다. 시작은 가뿐했고, 순조로웠다. 아침 새참, 점심, 오후 새참 빠뜨리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 먹고 마시며 느긋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게 스물이나 되는 일꾼이 북적대니 두려울 게 뭔가 싶었는데 그만 날이 저물고 말았다. 부랴부랴 자동차 전조등 켠 채 모판 앉히고 마지막으로 부직포 덮고 나니 아홉시가 넘었더라는, 그렇게 또 한 고비를 넘겼다는 얘기. 막판 뜻하지 않게 혼쭐이 났지만 ‘여럿이 함께 하는 농사’는 고달픈 농작업에 기운을 돋우고, 흥을 불러일으키며, 전래의 ‘두레정신’을 되살릴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벼농사다. 나는 내가 지어낸 쌀이 사람을 해치고 땅을 버리는 성분에 오염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농약이라는 이름의 독극물과 화학비료를 마다하는 까닭이다. 요즘 사회문제로 떠오른 ‘유전자조작(GM)벼 사태’는 이러한 선택의 기회조차 빼앗는다는 점에서 끔찍하다. 농촌진흥청이 내가 사는 완주를 비롯해 전국 7곳에서 벼를 비롯한 GMO 작물을 시험재배 중이라는 얘기다.여러 논란이 있지만 GMO는 안전성이 전혀 검증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개발을 중단해 마땅하다.
얼마 전 열린 농진청 앞 항의집회에 벼농사모임 회원들과 함께 참여해 목소리를 높여보기도 했지만 관련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고, 농진청의 ‘상용화’ 계획이 완전 폐기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시험재배일망정 만에 하나라도 유출돼 일반 농작물이 오염될 경우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건 상식이다. 내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벼를 닮았으되 벼가 아닌 괴생물체를 기르고, 쌀 모양이되 사람에 해로운 성분의 먹거리를 만들어내는 상황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이제 막 새싹을 올리는 볏모한테는 고마운 비다. 그렇게 자라서 논배미로 옮겨 가고, 쑥쑥 자라서 이삭을 올리고, 튼실하게 여물어 한 그릇 밥으로 상에 오를 건강한 쌀. 새삼 고맙다. * 월간 <작은책> 201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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