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29. 14:24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시골에 산다
6월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내다보이는 창 밖 풍경은 숨이 막힌다. 아직 점심 전인데 쨍쨍 내리쬐는 햇볕은 수은주를 30도까지 올려놓았다. 기후변화는 인간의 한없는 욕망으로 파괴되는 자연생태, 땅의 여신 가이아의 복수인지도 모른다.
논배미에 나가 있어야 할 이 시간에 발이 묶여버린 농부의 마음도 답답하다. 모내기를 보름 남짓 앞둔 지금 할 일은 지천이다. 논두렁과 물꼬를 손봐야 하고, 수북하게 우거진 풀도 베어야 하고, 도랑도 쳐야 하고 또... 그런데 저 불볕더위를 뚫고 나갈 엄두가 나지 않으니 속절없이 애만 태우고 있는 것이다.
올해는 더욱이 여러 가지로 일이 겹치는 바람에 농사준비에 애를 먹었다. 지난해 말 시작한 집짓기는 벼농사가 막 시작될 즈음인 4월말에 마무리됐다. 마침 농한기라 ‘직영공사’를 하게 되었고 비록 허드렛일이지만 일손을 보탤 수 있었다.
고맙게도 동네사람들이 몸으로, 돈으로, 마음으로 힘을 보태준 덕분에 ‘10년은 늙는다’는 손수 집짓기를 잘 헤쳐올 수 있었다. 해서 모내기로 더 바빠지기 전에 그 고마움에 보답하고자 ‘완공축하 작은 음악회’라는 이름의 잔치판을 마련했다. 다들 “면민의 날 행사 같다”고 할 만큼 많은 이가 북적였다.
그렇게 큰일을 치르고 났더니 이번엔 이 고장 공동축제인 ‘단오맞이 한마당’. 행사의 핵심 프로그램인 손모내기 체험 준비책임까지 덜컥 맡는 바람에 우리 농사일과 겹쳐 쩔쩔 매야 했다. 어쨌거나 일주일 간격으로 벌어진 잔치가 끝나고 나니 할 일이 태산인 거라. 이제 슬슬 움직여볼까 했더니 이번엔 불볕더위가 길을 막고 나선 것이다. 폭폭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 곳에 귀농해 농사짓고 산 지 올해로 7년째. 그럭저럭 자리를 잡고, 오십 줄 중반에야 비로소 ‘내 집’을 지었다. 귀농하기 전에는 전노협과 민주노총에서 신문을 만들었던 인연으로 현대자동차 노보에 실릴 글을 쓰고 있다. 이제는 20년도 더 된 얘기지만 민주노총 신문 <노동과 세계>에 ‘노동조합 24시’라는 꼭지를 새로 만들고 그 첫 순서로 현대자동차노조를 취재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나는 ‘베이비 붐 세대’의 끝줄이다. 그 세대가 아니라도 많은 이가 ‘인생2막’으로 또는 은퇴 이후의 삶으로 귀농을 생각하는 듯하다. 나는 어느 순간 ‘내가 도시에 남아 할 일이 없음’을 깨달으면서 무작정 시골로 내려온 경우다. 우연한 기회에 벼농사에 발을 들여놨고 지금은 그게 내 밥벌이가 되었다. 농약은 물론이요, 화학비료도 쓰지 않는 유기농이다. ‘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생태농사를 좇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지은 쌀은 모두 직거래로 소화한다. 고객은 주로 생태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도시 소비자들이다.
그렇게 1만평 유기농 벼농사로 그럭저럭 생계를 꾸리고 있다. 민주노총 그만 두던 시점에 받던 급여 수준이니 그리 높은 소득은 아니다. 도시 살 때보다 소비를 줄였지만 팍팍하지는 않다. 자연의 리듬에 따르다보니 한결 느긋하고 너그러워졌다. 일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거의 없는 편이다. 이따금 도시 살 때를 떠올리는데 어찌 그렇게 전쟁처럼 살아왔는지 섬뜩해진다.
요즘 한 인터넷 매체에 ‘낭만파농부의 시골살이’라는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데 좀 널널하게 사는 편이다. 죽을 때가 되어 아등바등 사느라 하고 싶은 일 못한 걸 후회하고 싶지 않다. 돈 버는 일보다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뜻있는 일을 작당하는데 더 열심이다. 집짓기 완공축하 작은 음악회도 그런 노력의 결과다. 벼농사모임을 함께 꾸리면서 ‘양력백중놀이’니 ‘진짜백중놀이’이 ‘황금들녘 나들이’ 같은 놀이판을 짜는 것도 다 그런 이유다. 이리 놀 궁리만 하고 사는데도 쪼들리지 않는 걸 보면 참 희한하다.
물론 농업을 홀대하는 정책기조가 바뀔 조짐이 없으니 미래를 낙관할 수만은 없다. 사실 “시골 내려가 뭘 지으면 억대연봉도 가능하다”는 얘기가 떠돌기도 하지만 얼토당토않은 얘기다. 농업소득은 수요-공급의 법칙이 지배하고, 작목선택이 모든 걸 좌우하는 ‘도박산업’인 게 현실이다. 설령 고소득이 가능하더라도 순간일 뿐이다. 그러니 혹 시골을 ‘기회의 땅’으로 여기고 귀농을 꿈꾸는 이가 있다면 먼저 그 망상부터 버릴 것을 권하고 싶다. ‘농’은 다름 아닌 자연이다. 귀농한다는 것, 다시 말해 시골에 산다는 것은 다름 아닌 자연에 귀의하는 삶이다. 자연생태의 질서와 더불어 사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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