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10. 15:30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먼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났다. 요즘은 전에 없이 일찍 눈이 떠지는 날이 많다. 그만큼 마음 쓸 일, 켕기는 일이 많다는 뜻이리라.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하루일정이 빡빡하다. 오후에 비봉 돼지농장에 대한 행정소송 재판부의 현장검증이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업체가 주민들의 거센 반대와 완주군의 ‘가축사육업 불허가’ 처분에도 농장을 다시 가동하겠다며 제기한 소송이 한창이다. 오늘 현장검증은 돼지를 사육해도 문제가 없는지 농장의 입지와 분뇨처리시설을 비롯한 돈사 전반을 재판부가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3년 전 실시된 현지 실측조사를 바탕으로 농장 재가동에 따른 환경영향평가(시뮬레이션) 촉탁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두 가지 절차가 마무리되면 1심 재판도 조만간 결말을 맺게 된다. 주민들로서는 법원의 판결로 ‘승패’가 갈리는 적대적이고 소모적인 방식보다는 업체가 완주군에 농장부지를 적정한 값에 매각함으로써 모두가 상생하는 길을 찾는 게 최선이라고 본다. 그 점에서 법원의 검증과 감정은 무척 중요한 과정이고 그만큼 긴장될 수밖에 없다.
동이 트고 날이 밝아오니 허옇게 내린 된서리가 눈에 들어온다. 기온도 영하를 찍고 있다. 가을인가 싶었더니 어느새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날씨다.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갈수록 가을이 짧아진다고 하지만 올해는 유난히 짧게 느껴진다. 가을걷이를 전후해 세상이 그만큼 바삐 돌아갔다는 뜻이렷다.
올해 벼농사 소출은 짐작했던 대로 역대급 흉작으로 드러났다. 우리 고산권 벼농사두레의 수확작업은 허탈함 속에 일주일 남짓 이어졌다. 그리고 건조작업을 거쳐 첫 방아를 찧었다. 가까스로 생산비를 건질 수 있을까 하는 수준의 결실이지만 벼농사두레 ‘영세농’들은 결코 주눅들지 않는다. 제 식구 먹을 식량과 가까운 친지들에게 선물할 몫을 챙기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다. 그래도 나름 ‘싸전’을 펼치고 주문을 받는 축도 제법 있다.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것, 바로 햅쌀밥잔치. 올해도 어김없이 스무 명 남짓 한 자리에 모여 햅쌀밥을 나누었다. 반찬은 겉절이와 구운 김이 전부. 그래도 축배를 들어야 하니 저마다 한 가지씩 마련해온 안주들이 ‘산해진미’를 이루었다. 누군가 준비해온 3조 주사위 놀이에 박장대소가 끊이지 않는다. 그 웃음 속에 대흉작의 속상함은 말끔히 씻겨나갔을까? 내년엔 올해의 ‘폭망’ 분까지 보상하고도 남는 대풍을 기원하며.
잔치를 끝낸 사람들은 저마다 다시 일상의 삶을 꾸려내야 한다. 생계형 쌀 전업농인 나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쌀을 팔아치워야 한다. 그동안 해 오던 대로, 직거래 망을 통해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문제는 공급가격. 대흉작으로 산지쌀값이 높게 치솟았다. 현물기준인 농지 임대료도 그에 비례해 폭등했다. 그게 쌀 생산비에 고스란히 반영되니 공급가 인상을 피할 수가 없는데... 고심 끝에 공급가를 그대로 두기로 했다. 코로나19로 너나없이 어려운 시절을 지나고 있으니 고통을 함께 나누자는 생각이다. 집밥 한 끼라도 좋은 쌀로 맘 편히 지어먹을 수 있도록.
그것이 무엇이든 나누는 삶은 아름답다. 단풍 곱게 물든 시절에 멀리서 느닷없이 찾아온 벗들과 더불어 나누는 따듯한 손길, 그리고 맑은 술 한 잔은 또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만나자, 그리고 나누자. 만남과 나눔이 아름다운 계절, 가을이 저물어간다. 월간 <완두콩> 2020년 11월호 칼럼
'누리에 말걸기 > <농촌별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쇄 찍었다는데 (0) | 2021.01.11 |
---|---|
이 겨울, 울안에 갇히다 (0) | 2020.12.14 |
풍진세상, 위로가 필요해 (0) | 2020.10.12 |
백수에 돼지에 (0) | 2020.09.11 |
논배미 물타령 (0) | 2020.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