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8. 17:36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삼월, 바야흐로 봄이다. 이제는 누가 뭐래도 돌이킬 수 없는 계절, 봄날이 온 것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함박눈이 펑펑 쏟아진다 하더라도 봄은 봄인 것이지.
울안 잔디밭 한 켠에 서 있는 매화가 마침내 꽃을 피웠다. 바로 어제 일이다. 아침나절까지만 해도 반쯤 벙글었더니 해거름이 가까워 활짝 열어젖혔다. 그나마 딱 한 송이. 다닥다닥 맺힌 꽃망울들은 한창 부풀어 올랐다. 머잖아 앞 다퉈 피어나겠지.
봄은 꽃이다. 꽃부터 피고 새순이 돋아나는 건 그 다음이다. 한 번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는 꽃들의 행진. 누구라도 어쩌지 못할 꽃 사태.
벙그러진 매화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나 보다. 앞 뒤 잴 것도 없이 꽃 맞을 준비에 들어갔다. 지난 가을, 서리를 맞히고서야 부랴부랴 줄기 채 갈무리해 둔 여러 가지 꽃씨를 털어 포트모판에 넣는 작업. 상토를 채우고, 물을 뿌리고, 씨를 넣고, 상토를 덮은 뒤 다시 물을 뿌리고 비닐하우스에 옮겨 두었다. 얼마 뒤 싹을 틔우고 줄기를 올려 자라난 뒤 한여름 무렵에야 꽃대를 올릴 화초들이다. 조바심치는 마음은 온통 그 맘 때 피어날 꽃으로 들어차 있다.
농사꾼 맞아? 완두콩, 강낭콩에 고추며 가지 씨를 묻어야 하는 때에 작물은 뒷전이고 꽃씨부터 챙기고 나선 꼴이라니.
이게 다 팬데믹 탓이다. ‘코로나블루’일 게 분명한 답답증에 희망이라도 찾을까 싶어 보름 전 경천 화암사에 다녀왔더랬다. 다행히 활짝 핀 복수초로 하여 그나마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우화루 앞뜰의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릴 무렵 다시 찾으리라 했었다.
기다리던 백신 접종이 시작됐다고는 하나 감염병 유행국면을 벗어나려면 아직 멀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이 고비를 이겨낼 에너지가 절실하고 싱그러운 봄기운은 그 점에서 더 할 수 없는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오늘 저도 모르게 화암사에 발길이 닿은 건 이런 까닭이리라. 늘 그렇듯이 이 잘 늙은 절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절간에 이르는 골짜기는 그 사이 몰라보게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말라 있던 계곡은 엊그제 내린 비로 졸졸졸 흘러내렸고 경칩 어름이라 여기저기 개구리 알이 실려 있다.
들머리 길섶, 고개를 살짝 내밀었던 복수초는 그새 짙푸른 잎이 무성하게 돋아나고 줄기도 성큼 자랐다. 새순만 올렸을까 싶었던 얼레지도 뜻밖에 연분홍 꽃잎을 피워 올려 그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지 않은가.
우화루 앞 매화도 꽃망울을 떠뜨렸다. 약간 부풀고 반쯤 벙그러지고 활짝 핀 꽃들이 마치 옥수수 튀밥을 흩뿌려 놓은 듯 물오른 가지를 수놓았다. 그 너머로 세월의 더께가 앉은 전각의 추녀가 아련하다.
오늘은 운이 좋았나. 적묵당 툇마루는 다행히도 텅 비어 있다. 다소곳이 걸터앉아 극락전과 우화루 사이로 펼쳐진 ‘선계의 풍광’에 넋을 잃고 빠져든다. 불명산 자락은 앙상한 수목으로 들어찼지만 솜털을 모두어 놓은 듯 푸근하기만 하다. 뭉게구름 떠 있는 새파란 하늘이 휩싸고 돌며 사바세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기세다.
이렇게 봄날은 왔는데 무엇인가 껄쩍지근한 게 있다. 그래, 봄 타령 꽃 타령에 농사준비는 언제 할 텐가. 그러고 보니 코로나 핑계로 신선놀음 하던 좋은 시절도 다 끝나가는 구나. 월간 <완두콩> 2021년 3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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