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12. 14:40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봄비 같은 겨울비가 내린다. 바깥 날씨가 포근하기까지 하다. 안 그래도 겨울잠 자던 개구리가 깨어나 알을 낳았다는 둥, 어디에서는 매화가 꽃을 피웠다는 둥 어리둥절한 소식이 전해지던 터다. 이렇게 지구가 더워지다가 결국은 종말에 이르겠거니 생각하면 가슴이 못내 서늘해진다.
엊그제도 그랬다. 변산반도 모항 해변, 벼농사두레 회원엠티를 다녀왔다. 허름한 옷차림으로 백사장에서 활개를 치다가 야외테이블에서 음료와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씻어낼 만큼 날씨가 푹했다. 다들 기후위기를 걱정하던 끝에 누군가 “그래도 엠티 날짜 하나는 기막히게 잘 잡았다”고 하자 너나없이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엠티라는 게 이름 그대로 회원 사이의 친목을 다지면서도 주요현안을 깊이 있게 의논하는 자리 아니던가. 날씨가 뒤받쳐준 덕분에 탁트인 수평선, 하얀 파도가 밀려드는 겨울바다를 한껏 호흡할 수 있었다. 그 기운을 받아선지 저녁 시간에 펼쳐진 현안 집중토의 시간은 그야말로 활력이 넘쳤다. 토의주제가 ‘내년도 벼두레 활동계획’이라서 뻔한 얘기가 나오거나 쭈뼛거리기 마련인데 이날은 그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특정 현안을 놓고 열띤 공방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과열되거나 몇몇이 발언을 독과점하지도 않으면서 사회자가 굳이 개입할 여지도 없이 자연스럽게 흐름을 타는 것이다.
그렇게 숨돌릴 틈도 없이 두 시간이 후딱 지나고 ‘열기를 식히기 위한’ 잠깐의 휴식시간. “토론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느냐”며 다들 뭔가 미진한 표정. 곧이어 토의가 재개되고 자정이 가깝도록 얘기꽃은 질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토의는 ‘차기 집행부 구성’에 집중되었다. 현 집행부의 임기(2년)가 끝나 다음(제4기) 집행부를 선출하는 정기총회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까닭이다. 현직 대표인 나로서는 이미 지난 선거에 나설 때부터 ‘이번이 마지막’임을 공표한 바 있고, 지난 총회에서 그 상황에 대비해 회칙을 개정하는 등 제도적 준비도 갖춘 상태다.
돌아보면 지난 2018년 고산권벼농사두레가 회칙을 마련하고 집행체계를 갖추고부터 내리 6년 동안 대표를 맡아왔다. 3연임이다. 뜻하지 않은 코로나 국면 때문에 늘어진 점도 있지만 할 만큼 한 셈이다.
무엇보다 강물은 끝없이 흘러가야 바다에 닿을 수 있다. 장강의 뒷물결은 끊임없이 앞물결을 대체하는 법이다. 사람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 아닐까. 물길이 막히거나 고이면 그 물은 탁해질 수밖에 없듯 사회 또한 끝없는 변화를 통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직의 변화란 결국 인적 쇄신일 수밖에 없다. 대의체계는 그것을 이끌어가는 인물에 따라 조직의 향방이 달라지는 까닭이다. 문제는 그 인물의 한계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균형감각이 출중한 경우라도 그것이 무궁할 수 없는 법이다. 어떤 테두리를 스스로 뛰어넘기 힘들고 길어지면 타성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인간의 한계에 부딪히는 시간이 되면 선수교체를 해주는 게 당연하다. 그것이 조직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길이다.
벼두레는 어렵지 않게 이 점에 공감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번 회원엠티를 시작으로 새로운 진용(대표 1인, 이사 5인, 총무 1인, 감사 1인)을 갖추기 위한 본격적인 논의에 나섰다. 열띠면서도 진지한, 그리고 팔딱거리는 물고기처럼 날것 그대로 펼쳐지는 토의 속에서 나는 희망을 보았다. 벼두레가 앞으로도 싱싱하게 살아 숨쉬리라는. 월간 <완두콩> 2023년 12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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