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13. 08:08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잔치는 끝났다. 비봉 돼지농장 완전해결 축하잔지.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3백 명을 웃도는 주민과 손님이 실내 게이트볼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비봉면 풍물패가 흥겨운 가락으로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고, 그 동안의 경과를 보고하고 소회를 나누는 간략한 의식에 이어 잔치음식을 나눴다.
두어 시간의 짧은 마당이었지만 준비하는 데는 십 수명이 꼬박 한 달을 매달려야 했다. 덕분에 별다른 말썽 없이 뜨거운 분위기에서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다>를 표제를 단 경과보고서를 발간해 돼지농장 재가동을 막아낸 그 지난한 과정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 뿌듯하다.
이리하여 이지반사(이지바이오 돼지농장 재가동을 반대하는 완주사람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 자리를 빌어 이 큰 잔치를 준비하느라 애써준 이지반사 집행위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들이야말로 8년에 걸친 기나긴 싸움의 실질적 주인공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아무튼 싸움에서 이기고 잔치도 끝났으니 나 또한 본연의 자리로 돌아왔다. 내 본연의 자리란 다름 아닌 농사꾼, 쌀 전업농이다.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잔치판에 넋이 나가 있다가 돌아와 보니 논배미가 확 달라져 있다. 그 사이 벼 이삭이 패고 가루받이를 거쳐 어느새 살짝 고래를 숙이고 있다. 작황도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다. 참 다행이다.
그런데 뭔가 어수선하다. 그 사이 벼포기도 쑥쑥 자랐지만 옆 자리의 풀도 거침없이 몸피를 키운 것이다. 게다가 기후변화 탓에 유난히도 비가 많이 내렸고 기온이 높았던 탓에 논둑은 마치 정글이라도 되는 양 잔뜩 우거져 있다. 사람이 지나 다닐 수 없을 지경이다.
허겁지겁 예초기를 둘러 매고 쳐내고 있다. 풀대가 굵고 질겨서 예초기 칼날이 잘 먹히지 않아 힘이 곱절로 든다. 더욱이 늦더위까지 이어지는 바람에 금세 힘이 패이고 두 어 시간 기계를 돌리고 기진맥진, 곤죽이 된 몸을 추슬러 집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그나마 이것이 한 해 농사의 마지막 고비라는 걸 위안 삼아 버텨낸다고 할까.
그렇다. 벼이삭이 갈수록 고개를 깊이 숙이고 나락이 여물면 한 달 남짓 뒤 가을걷이를 하게 된다. 결실의 계절, 수확의 기쁨 따위로 일컬어지는 참 풍성한 시절이 다가오는 것이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순 없을 것이니 이 늦더위도 머잖아 물러가고 선선해질 것이다. 그러니 놀기에도 딱 좋은 시절.
노는 일에 벼농사두레가 빠질 수 없지. 안 그래도 이번 주말 함께 영화를 감상하는 것을 신호로 ‘가을의 여정’이 시작된다. 완주미디어센터 주최로 읍면 단위를 순회하는 ‘품앗이 상영회’가 그것. 고산면의 경우 올해는 벼농사두레가 주관 단체로 선정돼 9월15일 오후7시 미디어센터에서 <우수>를 상영한다.
그 뒤를 이어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 탓에 3년을 거른 ‘황금들녘 풍년잔치’가 펼쳐진다. 나락이 익어가는 논배미에서 메뚜기 잡고, 10월초의 저녁 한때를 흥겹게 즐기는 프로그램으로 주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이어 갓 수확한 쌀로 지은 햅쌀밥을 함께 맛보는 햅쌀밥잔치, 누군가 벙개를 치면 느닷없이 만들어지는 또 다른 자리가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벼두레컵 당구대회’ 같은 이벤트가 펼쳐질지도 모르겠다.
큰 잔치 끝내고 제자리로 돌아와 보니 이렇듯 또 잔치판이 기다리고 있다. 이게 행복일까? 월간 <완두콩> 2023년 9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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