햅쌀로 지은 '광란의 밥'

2023. 11. 13. 16:05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이틀 내리 세찬 바람이 불었다. 굵은 빗줄기까지 함께 내리쳤다. 그 바람에 비닐하우스 위에 똬리를 튼 등나무 덩굴이 훌러덩 벗겨져 거꾸로 처박혔다. 담벼락을 타고 오른 담쟁이, 얼마 남지 않았던 이파리마저 죄다 떨어져 앙상하게 덩굴만 남았다. 산과 들녘의 풍경도 사뭇 바뀌었다. 뒷산 소나무는 솔가리를 우수수 쏟아내고 활엽수는 저마다 마른 잎을 떨궈 오솔길은 다시 바스락거리기 시작했다.

 

비바람 그치고 나니 겨울 초입이다. 최저기온이 영하권으로 뚝 떨어지는 바람에 보일러에 서둘러 난방유를 채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앞집 지붕에 내린 허연 된서리가 맨 먼저 들어온다. 호박잎이 눅어 오그라진 지는 벌써 며칠 되었고, 새빨간 꽃을 꼿꼿이 세웠던 백일홍도 칙칙하게 빛이 바랬다. 그래도 김장배추는 끄떡없다. 고라니 등쌀에 겨우 열댓 포기가 살아남았는데 이제야 속이 차오르고 있어 제구실이나 할 수 있을는지. 해 저무는 산등성이를 물들인 노을이 유난히 붉게 빛난다.

 

이게 다 겨울 채비를 서두르라는 신호들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살림살이가 단출하니 딱히 준비할 건 없을 것 같고. 가을걷이 하느라 종종거릴 땐 눈코 뜰 새가 없었는데, 일 다 끝내고 첫 방아 찧어 밀려든 직거래 쌀 보내놓고 나니 갑자기 널널해진 하루가 낯설기만 하다. 하릴없이 빈둥대다가 어제는 미디어센터에서 틀어주는 영화 ‘n차 관람하고, 오늘은 새로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보고. 이 사람과 점심 먹고, 저 사람과 술잔 기울이는 날들.

 

물론 할 일이 없는 건 아니다. 잠깐의 조정기간일 뿐이다. 머잖아 이 겨르로운 농한기 질서도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핑계로 제법 바빠질 것이다. 이를테면 햅쌀밥 잔치같은 것.

 

첫 방아 찧고 나서 어김없이 잔치판을 벌였다. 헤아려보니 어느덧 6년째. , 중뿔날 것도 없다. 그저 갓 거둬들인 햅쌀로 지은 밥을 함께 나누는 거다. 그 사이 코로나 팬데믹에 뜻하지 않은 국가적 참사 속에서도 한 해 농사를 갈무리하는 뜻깊은 자리이니 건너뛸 수가 있겠는가. 오로지 햅쌀밥의 힘으로 펼쳐지는 잔치.

 

왜 햅쌀밥인가. 깔과 향, 맛에서 묵은 쌀밥과 견줄 바가 아니다. 기름이 자르르 윤기가 도니 눈맛부터 다르다. 한 술 떠 넣으면 입안 가득 퍼지는, 형언할 수 없는 그윽한 향. 황홀함에 잠깐 동안 아득해지는 느낌. 씹으면 이내 살살 녹는다거나 혀에 착착 감긴다”. 구수한 듯도 하고, 감칠맛이 돌기도 한다. 특히 <참동진> 품종은 쌀알이 굵어 식감이 탱글탱글. 오죽하면 반찬 없이도 한 사발 뚝딱 해치운다고 했던가. 이번에도 밥이 모자라 두 번, 세 번 밥을 지어내느라 허둥거려야 했다.

 

이렇듯 입이 호강하면 저절로 흥이 나는 법일까. 미리 짜두었거나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스스럼없이 나서 노래 한 자락 뽑아내는 이가 있다. 그것이 신호탄이 되어 분위가 후끈 달아오른다. 그 틈을 놓칠세라 누군가 휴대용 노래방기기를 꺼내 온다. 이어지는 광란의 밤’. 그날 어떤 정경이 펼쳐졌는지는 이쯤에서 접어두기로 하자. 다만 밤이 이슥해 자리를 뜨는 표정들이 몹시 아쉬워 보였다는 거.

 

사실 낯익은 풍경이다. 올해 농한기도 이렇게 시작됐다. 더 많은 핑계로 더 많은 잔치판이 펼쳐질 것이다. 이제 그것을 모의하는 회의자리로 향할 시간이다. 월간 <완두콩> 2023년 11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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