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9. 08:59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황금물결 일렁이던 들녘은 이제 칙칙한 흑갈색으로 되돌아갔다. 벼 가을걷이가 다 끝난 것이다. 하지만 죽산 마을 앞 우리 논 네 마지기만은 누런 벼 포기가 그대로 서 있다. 무슨 새로운 농법을 실험할 요량이냐고? 그러면 오죽 좋으랴만 알고 보면 ‘폭폭헌’ 노릇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속이 타들어갔다. 아침나절, 콤바인 수확작업을 부탁하러 죽산 마을에 다녀왔다. 하지만 헛걸음.
“아, 벌쎄 기계 청소혀서 느놨는디! 부속 멫 개까정 빼놔서 안 되야!”
통사정을 해봐도 요지부동이니 어쩔 수 없이 물러설 밖에. 하긴 고작 네 마지기 작업비 바라고, 창고에 넣어둔 기계를 다시 꺼내기란 나라도 쉽지 않을 터다. 게다가 이웃마을에서, 그것도 생판 모르는 사람인데 오죽하랴. 이래저래 막막하기만 하다.
일은 막판에 꼬였다. 다른 곳은 수확을 모두 끝낸 상태에서, 죽산 논 작업을 하루 앞두고 준비(기계진입로와 귀퉁이를 낫으로 베어내는 일)하러 갔다가 까무러칠 뻔 했다. 말라 있으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던 논바닥 절반에 물이 흥건하고 질척거리는 게 아닌가. 바깥쪽이 마른 것만 확인하고 언덕과 잇닿은 안쪽은 미처 둘러보지 않았는데, 언덕에서 계속 물이 흘러든 것이다. 지난 몇 년 묵혀뒀다가 올해 처음으로 지은 논이라 그 특성을 제대로 알 수 없었던 탓이다.
이튿날 작업이 늦춰진 건 두 말할 나위도 없고, 그 상태로는 아예 기계작업을 할 수 없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질척한 곳은 일일이 낫으로 베어낼 수-이게 바로 ‘벼베기’다-밖에 없다. 혼자서는 엄두가 안나 영록 씨한테 하소연했더니 친구 한 명과 함께 두 어 시간 도와주고 갔다. 그래봤자 턱도 없다. 같은 생태작목반 주란 씨한테 사정을 얘기했더니 다음날 점심때가 막 지나 전화가 왔다.
“지금 그 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논 위치가 어디래요?”
주란 씨만이 아니라 조금 뒤에는 정화 씨와 영자 씨가 잇따라 도착했다. 반가운 마음보다는 여인들에게 그 험한 논일이라니, 미안함이 앞선다. 그래도 여럿이서 낫질을 하고, 볏단을 묶어 세우니 아득하기만 하던 작업이 한나절 만에 끝이 났다. 기적이나 진배없다.
이제 콤바인만 ‘모셔오면’ 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지금껏 우리 논을 맡아온 이의 콤바인은 크게 고장 나 정비공장에 들어가 있다 하고, 한 동네 다른 이들 기계도 이런저런 이유로 작업이 어렵다고 한다. 하여, 오늘은 멀리 이웃동네 죽산까지 달려갔던 것이고 앞서 보았듯 거기서도 퇴짜를 맞은 것이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했던가. 방금 전, ‘구세주’가 나타났다. 친환경벼작목반 장 회장이 그 주인공. 그냥 옆 마을도 아니고, (만경)강 건너 양야리에 사는 분인데, 염치 불구하고 부탁을 했더니 오늘 오후에 일을 하자는 거다. 어제가 대학입시 수능시험 날이었는데, 장 회장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이 내겐 수험생들의 심정이었다.
이렇게 또 한 고비를 넘기는가 보다. 서른 마지기 논에서 난 햅쌀은 지금 ‘도농직거래’ 방식으로 팔려나가고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호응이 좋고, ‘밥맛 좋다’는 입소문이 났는지 추가주문도 꼬리를 물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크고 작은 사고가 터져 애를 태우는데, ‘해피앤드’로 끝난다는 보장만 있다면 ‘스릴’로 여길 수도 있겠건만... ‘수확의 기쁨’이란 게 달콤하지만은 않음을 절감한다. 또 하나 배웠다. <완두콩> 2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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