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농업의 미래를 생각한다

2015. 12. 15. 23:59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기업 뜯어먹는" 농민? 새누리 하태경은 들어라!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농민을 귀하게 여겨라
미리 밝혀두건대 좀 거친 표현을 쓸 지도 모르겠다. '핏대를 세우는' 글쓰기, 참으로 오랜만이지 싶다. 직장이 민주노총이고 싸우는 게 직업이던 시절, 그러니까 감정을 실어 부서져라 키보드를 두드려대던 게 어느덧 10여 년 전 일이다. 물론 지금보다 혈기도 방장했고, '피 튀기는' 현장에 훨씬 가깝게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겠다. 그럼 지금은?

민주노총 간부에서 전업농으로

<전원일기>를 찍으며 살고 있다. 햇수로는 이제 5년이 되어간다. 이런 저런 이유로 쌀 전업농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나 같은 농사꾼한테는 이 즈음이 최고의 호시절이다. 거둬들인 나락 수북이 쌓아두고 조금씩 찧어 내놓다보면 밤새 내린 눈처럼 통장에 잔고가 소복소복 쌓인다.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왠지 든든한 느낌, 짐작할는지 모르겠다.

해서 보잘 것 없는 살림 속에서도 "농한기가 왔다"며 한껏 들뜨게 된다. 천하가 좁다 쏘다니기도 하고, 여기저기 호기롭게 인심도 써본다. 거칠 게 없으니 바깥 풍경도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눈 쌓인 산자락이며, 텅 빈 들판 따위 고즈넉한 풍경을 찬미하느라 바빴더랬다. 그야말로 음풍농월이요, 설령 농사철 화가 치밀더라도 기껏 하늘이나 원망하는 데 그치고 말았었다.

여느 해 같으면 그랬을 것이다. 아니 이번에도 시작은 창대했다. 가을걷이를 마치자마자 남녘바다 작은 섬을 휘돌았고, 내쳐 동네 사람들 꼬드겨 산 너머 작은 절의 곱디고운 단풍을 눈에 넣고 왔더랬다. 하지만 그걸로 끝. 지금은 아름다운 겨울들녘도 없고, 농한기의 흥도 나지 않는다.

쌀은 풍년이나…

▲ 어린 학생들에게 모심기를 안내하는 필자. ⓒ차남호

온갖 통계 자료는 유례없는 풍년을 일러준다. 그런 지표가 아니라도 대풍작을 절감한다. 우리 집만 해도 쌀 소출이 지난해보다 50% 가까이 늘었으니까. 하지만 이게 외려 재앙이 되고 있다. 사실 '수요-공급의 법칙'을 배운 이들한테는 특별할 것도 없는 현상이긴 하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기초 식량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바로 나한테 닥친 일이라는 점에서 예사롭지가 않다. 정말 그렇다.

농가들은 수확한 벼를 공공 비축미로 수매하거나 방앗간 등 미곡상에 통째 넘기는 게 보통이다. 그게 헐값이라는 걸 알지만 울며 겨자 먹기다. 당장 논 임대료, 농기계 삯, 농자재비 갚을 목돈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판로를 뚫는 일이 쉽지가 않은 까닭이다.

반면에 나는 지금껏 '직거래' 방식으로 쌀을 소화하고 있다. 유통 마진을 없애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 득이 될 뿐 아니라 '생태' 가치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운이 좋았던지 웬만큼 판로를 갖출 수 있었고, 지난해까지는 큰 어려움 없이 '완판'했더랬다. 아니 너무 일찍 쌀이 동나는 바람에 원성을 들을 정도였다.

그런데 올해는 영 다르다. 생산량이 늘어난 탓도 있지만 쌀 팔려나가는 속도가 지난해만 못하다. 통장 잔고가 느릿느릿 쌓이다보니 이미 시원하게 털어버렸을 외상값도 독촉 전화를 받고서야 겨우 치르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판매 추이다. 얼추 셈을 해보니 이대로라면 결국 쌀이 남아도는 상황을 맞을 같다. 여기저기 구원을 청하느라 법석을 떨고 있지만 아직은 낙관할 수가 없다.

곤두박질치는 쌀값

나 같은 경우가 이 정도인데 다른 농가는 더 말해 무엇 할까. 사정이 좋지 않을 것임은 진즉에 예견된 일이었다. 실제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쌀값이 20년 전 수준으로 후퇴했다고 한다. 산지 쌀값은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치는 1가마 16만 원이 지난해 이미 무너졌고, 올해는 15만 원에서 14만 원으로, 다시 13만 원으로 계속 곤두박질치고 있다.

김제의 한 쌀 전업농이 털어놓은 얘기는 귀를 의심케 한다. 경작 면적이 전국 평균의 6배가 넘는 15헥타르(4만5000평)나 되는데, 올해 손에 쥔 소득이 고작 1500만 원이란다. 그나마 직불금을 계상할 때 그렇고, 농사 자체로는 1300만 원 적자라 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액수다.

2차 민중 총궐기가 펼쳐진 지난 12월 5일, 경기도 농민 대열은 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의 공약 현수막을 앞세웠다. '쌀값 인상! 17만 원을 21만 원대로'. 그 옆에는 따로 "입이 있으면 말을 해봐라!"는 항변이 적혀 있었다. 

수요보다 공급이 넘쳐 빚어진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의무 수입 물량이 40여만 톤인데 풍작이 겹쳐 예상 소비량을 35만 톤을 웃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쌀 사태를 불러온 데는 농정 당국의 빗나간 정책도 한몫했다. 거센 반대 여론 속에서도 의무 수입 물량의 30%를 밥쌀로 수입함으로써 쌀값 하락을 부채질했다. 초과분 35만 톤을 전량 시장 격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빗발쳤지만 당국은 고작 20만 톤만 격리했고, 그나마 뒷북 행정이었다.

지금 같은 국제 교역 체제에서는 정책 운용의 폭이 좁은 것도 사실이다. '자유무역협정(FTA) 경제 영토' 세계 3위를 자랑하는 나라 아닌가. 오는 20일부터는 새로 중국, 뉴질랜드와 맺은 FTA가 발효된다고 한다. 머잖아 이들 거대 농업국의 농산물이 무관세로 밀어닥치면 또 어떤 농사를 지어야 할지, 아니 농사지어서 목구멍에 풀칠이나 할 수 있을지 농민들은 한걱정이다.

쌀로만 보더라도 어차피 해마다 40만 톤 넘게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므로 쌀은 늘 공급 과잉이 될 수밖에 없다. 논을 놀리거나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방법으로 쌀 생산을 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는 식량 주권을 생각한다면 옳지 않은 일이고, 또 다른 품목의 공급 과잉을 낳을 것이다.

물론 협정을 폐기하고 FTA 체제를 해체하면 이런 문제는 단박에 풀린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FTA는 1차 산업 시장을 내주는 대신 공산품 교역 조건을 개선하자는 것이다. 말이 좋아 공산품이지 실제로는 국내 재벌을 비롯한 초국적 자본 챙겨주는 협정에 다름 아니다.

아무튼 교역 체계가 바뀌면 그에 따른 이해 득실이 엇갈리게 마련이다. 이에 따라 FTA로 불어난 이윤을 일부 환수해 피해자를 지원하자는 취지로 '무역 이득 공유제'가 제기됐다. 그런데 정치권 논의를 거치면서 법적 구속력도 없는 '농어촌 상생 기금'으로 둔갑해버렸다. 게다가 '피해자 단체'랄 수 있는 농수축협한테도 기금을 걷겠다니 어안이 벙벙하다.

OECD 15% 보조금이 "기업 뜯어먹으려는" 행태?

하태경이라는 '금배지'는 이마저 "해마다 1500억 원을 기업한테 뜯어먹으려는" 행태로, 우리 농업과 농민을 보조금으로 연명하는 존재로 몰아붙였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디 하태경 뿐이던가. 우리 사회에는 농업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사실과 다른 인식이 퍼져 있다. 

직불금, 면세유 같은 농업 보조금이 대표적이다. 한마디로 너무 많이 퍼준다는 것인데, 사실과 동떨어진 얘기다. 현행 직불금 제도로는 쌀값 폭락으로 줄어든 농가 소득을 제대로 보전해주지 못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15헥타르 농사 소득이 1500만 원에 지나지 않겠나.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 농민 1인당 보조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15%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은 우리의 13배, EU는 15배, 미국은 44배나 된다. 집권 세력이 농민 정당이라서가 아니다.

▲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 ⓒ연합뉴스


농업은 먹을거리를 책임지는 산업 분야다. 먹을거리는 생명권과 직결된 사실상의 공공재다. 식량 주권은 흔히 오해하듯 농민의 권리가 아니라 먹어야 살 수 있는 모든 이에 해당한다. 농업은 먹을거리를 만들어내는 것 말고도 생태 환경 유지 보존에 절대적으로 기여한다. 토양 유실 방지, 대기 정화, 수자원 함양, 경관 유지 같은 '공익적 기능'을 떠맡는다.

식량 주권 지키는 농민을 귀하게 여겨야

그러니 농사짓는 일 자체를 귀하게 여기고, 북돋워 마땅하다는 얘기다. 농업 소득이 생계를 받쳐주지 못한다면, 너도 나도 농사에서 손을 뗄 텐데 그 때는 식량 주권이고, 생태 환경이고 다 부질없게 된다. 따라서 당장은 동떨어져 보이더라도 농민 기본 소득, 주요 농산물 국가 수매 같은 획기적인 제도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

솔직히 이런 얘길 꺼내는 게 계면쩍다.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탓이다. 박근혜 정권은 거듭된 공약 파기와 말 바꾸기로 농민의 신뢰를 잃었다. 쌀값뿐만이 아니다. 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농업을 직접 챙기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빈말일 뿐이었다. 농업은 외려 국정 우선순위나 예산에서 찬밥에, 쪽박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오늘의 농업-농촌 현실은 이 정권에만 책임을 묻기 힘든 게 사실이다. '기계화-규모화'로 상징되는 기업농 육성 정책은 이른바 '민주 정부'를 비롯해 역대 정권이 펼쳐온 농정의 기본 방향이었다. 이는 대다수 농민을 농업에서 내쫓으려는 '살농 정책'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칠순 농민 백남기 옹에게 살인적인 물대포 세례를 퍼부은 사건은 이 정권이 농민을 어찌 대하는지 뚜렷이 보여준다. 농심이 부글부글 끓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유체 이탈 화법'으로 남 탓하고, 책임을 떠넘기면 우르르 달려들어 국면이 전환되는, 그런 식의 위기 탈출이 언제까지 계속될 거라고 믿는가.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보라!"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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