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3. 15:45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10월의 첫날. 이틀 동안 내리던 비가 멎었다. 하늘은 맑고 산야의 수목은 훨씬 또렷한데,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어느덧 가을이 많이 깊었다.
간밤에는 읍내 ‘서쪽숲’ 카페에서 김사인 시인의 작은 강연이 열렸다. ‘술과 시, 그리고 가을’이 주제였는데, 어쩌다가 뒤풀이에 휘말리면서 밤늦도록 통음을 하고 말았다. 주제 값을 한 셈인가? 아무튼 쓰린 속을 부여안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속을 끓게 하는 건 숙취만이 아니다. 요즘 나라꼴이, 세상살이가 말이 아닌 까닭이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았음에도 대통령이 김재수 씨를 농림부장관에 임명하자, 국회는 다시 해임안을 의결했다. 대통령은 이 해임안마저 뿌리쳤다. 여당이 국정감사를 보이콧하고, 여당대표가 국회의장 사퇴를 요구하며 비공개 단식을 벌이는 희한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이 같은 상황전개가 워낙 어이없다보니 다른 중요현안을 가리려는 물타기 아니냐는 분석까지 나왔다. 대통령의 절친이고, 심지어 ‘실제 권력서열 1위’라는 말까지 돌고 있는 최순실이라는 인물을 둘러싼 딸에 대한 특혜,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 갖가지 비리추문이 그것이다.
한 마디로 엉망진창이다. 정녕 이것이 나라인가 싶어진다. 하긴 이런 아수라장이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그저 버릇처럼 한숨만 내쉴 뿐이다. 정작 안타까운 일은 따로 있다. 어느 늙은 농부의 한 맺힌 죽음. 마치 내 일인 듯 서럽고, 노여움이 북받친다.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 집회에 나섰다가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1년 가까이 사경을 헤매다 끝내 숨을 거둔 고 백남기 옹 얘기다. 누가 보더라도 이는 국가폭력이 저지른 살인이다. 그 때 상황을 담은 동영상이 이미 만천하에 공개돼 있다. 그러나 그 책임을 묻는 사법절차는 감감무소식, 수사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대통령부터 경찰총수에 이르기까지 사과 한 마디조차 없다. 통탄할 노릇 아닌가.
그 사이 연명치료로 생명을 이어오던 백남기 옹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진상파악, 책임자처벌, 재발방지를 위한 법제도 개선...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은 채다. 얼마나 한이 맺혔을 것인지.
그런데 적반하장이라고 시신을 부검하겠다고 한다. 칠십 노인한테 폭력을 휘둘러 죽음으로 내몬 가해자 경찰이 사망원인을 조사해 밝히겠다는 것이다. 법원이 부검영장을 기각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영장을 다시 청구했고 이번엔 ‘유가족과 협의’라는 조건을 달아 청구를 받아들였다. 전에 없던 일이라고 한다. 정권의 온갖 압력과 회유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가 있는가. 치미는 부아를 다스릴 길 없고, 서글픔은 커져만 간다. 고 백남기 옹은 이 나라 농업과 농민이 당한 처지 그 자체인 까닭이다.
평생 묵묵히 농사지어 이 나라의 밥줄을 이어왔건만 그에 걸맞게 대접받은 바가 없다. 외려 이리 치이고, 저리 채이고 거대자본의 희생양 노릇만 해왔다. 참다못해 농민도 함께 살자고 했더니만 물대포로 답했다. 그의 마지막 외침은 ‘밥쌀 수입중단!’이었다. 서글프고 또 서글프다.
‘결실의 계절’을 맞는 마음이 어수선하기만 하다. 올해도 ‘황금들녘 나들이’라 해서, 풍년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동네잔치판을 벼농사모임에서 열기로 했다. 벼이삭 익어가는 논길을 걸으며 메뚜기 잡고, 부침개 부쳐 막걸리 잔 기울이며, 풍물가락에 어깨춤이라도 춰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 한 켠이 자꾸만 켕겨온다. 참 서러운 시절이다. 월간 <완두콩> 10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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