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30. 18:25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게다가 풍년이 아니었다. 벼이삭이 패고 익어갈 무렵 “올해로 4년 내리 풍년”이라는 전망이 퍼졌더랬다. 그 바람에 ‘풍년의 역설’이라고, 쌀값이 폭락을 넘어 ‘붕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풍년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만 해도 작년보다 20% 남짓 소출이 줄었다.
한 달 넘게 이어진 폭염과 가뭄으로 제대로 여물지 않은 탓이다. 가을철에 때 아닌 잦은 비로 일부지역은 멀쩡한 벼이삭에서 싹이 트는 수발아 현상까지 더해 피해가 크다고 한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셈이다. 농민들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요즘이다.
나라꼴도 말이 아니다. 엉망진창인 이유가 있었다. 검증되지도, 선출되지도 않은 최순실이라는 인물이 허깨비 대통령을 앞세워 국정을 농단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캐도 캐도 끝이 없는 형국이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마치 왕조시대 어리석고 멍청한 임금을 다룬 사극을 보고 있는 듯하다. 민주화된 공화국에서 이런 참담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녕 이게 나라인가.
누군가 이를 ‘중우정치’라 조롱하고, 미개한 정치수준을 경멸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누굴 탓하겠는가. 현실정치와 멀리 떨어진 한낱 농사꾼에 지나지 않지만 나는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아울러 ‘그 때 박근혜를 뽑은 우매한 대중’을 원망하기에 앞서 어쩌다가 박근혜 따위에 패배하게 됐는지, 그런 어이없는 정치적 선택에 스스로 빌미를 제공했던 건 아닌지 반성할 일이하고 본다.
물론 지금은 자책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엄히 책임을 물어야 할 때라는 것에 이의가 없다. 그런데 이 사태의 최종책임자는 문제의 심각성도, 부끄러움도 모르는 것 같다. 외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든다. 느닷없이 개헌카드를 꺼내는가 하면 하루도 안 돼 들통날 ‘거짓 사과’로 주권자를 얕잡아 본다. 참 구질구질하다. ‘가짜’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마당에 도대체 무슨 낯으로 대통령 노릇을 계속 하겠다는 건지. 여론추이를 보더라도 박근혜는 이미 끝났다. 깨끗이 물러나 그나마 동정표라도 얻을 일이다.
한편 ‘최순실 테블릿PC'를 입수한 JTBC의 보도 이후 상황이 급반전되고 그 동안 가려졌던 추악한 진실이 우후죽순처럼 드러나고 있다. 게 중에는 ‘사생활’의 영역까지 무차별 폭로되면서 사태의 본질을 흐리기도 하는데 좀 진중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최순실 일당의 국정개입이 사람들을 격분시키는 것은 농단(壟斷), 다시 말해 ‘부당하게 일을 벌여 이권을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저들의 개입이 애초 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고 근로대중의 권익을 신장하는 방향이었다면 문제로 불거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최순실 일당만 배를 채운 게 아니란 사실 또한 눈여겨볼 일이다.
예컨대 문제의 미르재단‧K스포츠재단 설립과정에서 재벌들이 기부금을 강요당한 피해자로 등장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그 과정이 정경유착의 고리였고, 일방적으로 ‘삥뜯긴’ 게 아니라 더 큰 이득으로 돌아왔음이 여러 언론보도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그 뿐인가. 거대자본을 주인공으로 하는 시장원리주의 지배구조는 더욱 단단해졌다. 그 반작용이 ‘성과퇴출제’ 같은 정책이고, 노동자 절반이 월급 2백만원도 안 되는 불평등한 현실이다. 20년 전으로 후퇴한 ‘농민값’은 그나마 안중에도 없다.
철없는 가을비까지 더해 아직도 벼수확을 끝내지 못했지만, 나라꼴을 바로잡는 일에 뭐라도 힘을 보태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 이유다. 월간 <완두콩> 11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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