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8. 19:57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려는 일마다 ‘파토’다. <농한기강좌>에 이어 이번엔 고산권 벼농사두레 정기총회가 취소됐다. 예정대로면 회칙을 개정하고, 임기가 끝난 임원진을 새로 뽑았어야 한다. 지난해 총회 때 사람들이 배꼽을 쥐며 즐거워했던 ‘멋진 회원상’ 시상식이 회의장을 후끈 달궈놓았을 것이다. 뒤풀이 자리에서는 부딪히는 술잔 사이로 온갖 무용담과 뒷담화가 피어올랐겠지.
그러나 코로나19가 바꿔놓은 새로운 질서는 이 모두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1차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이 끝나는 날에 맞춰 모든 게 착착 준비된 상태였다. 그러나 개학이 다시 연기되고, 정부가 더욱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을 발표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회의장을 예약해뒀던 기관에서는 ‘대관 취소’를 알려왔다.
이런 가운데서도 선뜻 정기총회를 유보하기가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무엇보다 현 임원진의 임기가 끝나는 상황이 가장 걸리는 문제였다. 회칙에는 임원진을 “정기총회에서 회원들의 직접선거로 선출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위기상황 아래서도 구성원의 선거권-피선거권은 보장돼야 하는 게 기본원칙 아니던가. 그래서 전쟁 통에도 선거를 실시하는 것이 ‘민주적 전통’이라고 교과서는 가르쳐왔다. 실제로 21대 국회의원 선거는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 중에 예정대로 치른다지 않는가. 아찔한 장면이 적지 않은 선거운동과 투표소로 몰릴 인파는 몹시 위험한 상황을 부를 수 있다. 그래서 ‘총선 연기’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반향이 거의 없는 형편이다.
벼농사두레가 한낱 임의단체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바로 그 점에서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확진자가 전혀 나오지 않은 동네이니 발열체크, 마스크 쓰기, 안전거리 확보 같은 방역지침을 잘 지킨다면 그리 문제될 게 없지 않겠냐는. 그러나 이런 판단이 ‘만에 하나’까지 씻어내지는 못하는 법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기본원칙을 건너뛰어야 하는 상황인지를 회원들에게 직접 묻기로 했다. 사상 처음으로 온라인 투표를 진행했다. 예상대로 회원 대다수가 ‘총회 유보-현체제 연장’에 손을 들었다. 나 또한 대표직을 2년 더 맡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기운이 쑥 빠진다. 자연스레 코로나19가 몰고 온 ‘딴 세상’을 새삼 다시 짚어보게 된다. 강요된 칩거 국면은 과연 언제나 풀릴 것인가. 거리두기가 해제되더라도 바이러스를 완전히 퇴치하지 않는 한 언제든 재발할 텐데. 코로나19가 ‘사회적 거리두기’ 수준을 넘어 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것이란 분석도 제기된다. 걷잡을 수 없이 우울해진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 느닷없는 북새통에 수입이 줄고, 일자리를 잃어 당장 먹고 살 일이 걱정인 경제적 약자들이 떠오른다. 정치권에서는 턱없이 적은 액수의 재난지원금을 70%에 지급하네, 전국민으로 확대하네, 선거를 의식한 뜸들이기에 여념이 없다. 하루가 급한 마당에.
이런 와중에도 어김없이 농사철은 돌아왔다. 벼농사 전업인 나는 볍씨를 담그는 이달 말이 시발점이 된다. 볍씨를 틔워 모판에 넣고 못자리에 앉히는 초반작업에는 많은 일손이 필요하다. 물론 벼농사두레의 회원들이 품을 나누는 두레(협동)작업으로 해치우게 된다. 한편으로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된다. 혹여 코로나19 등쌀에 협동작업도 못하는 건 아닌지. 설마 그럴 일까지는 없겠지.
비록 지금은 난리 통을 지나고 있지만 일과 놀이가 하나 되고, 농사와 잔치가 어우러지는 ‘두레의 시간’을 고대한다. 월간 <완두콩> 2020년 4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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