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10. 11:37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눈이 제법 내렸다. 이번겨울 들어 처음이니 ‘첫눈’이라 이를 법하다. 설을 쇤 지 한참이고, 보름을 앞두고 있는 즈음에 첫눈이라니. 이웃집 아낙이 오밤중을 아랑곳 않고 동네톡방에 “첫눈이다!” 설레발을 칠 만했다. 부리나케 바깥등을 켜고 커튼을 젖히니 ‘매화꽃잎 흩날리듯’ 눈발이 날리고 있다.
날이 새면 ‘설국’은 아니라도 ‘은세계’가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비탈 쪽으로만 듬성듬성 쌓였다. 고샅길이 눈으로 막혀 승용차가 발이 묶이는 건 아닌지 살짝 걱정했던 터라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명색이 첫눈 아니던가. 게다가 수은주도 뚝 떨어져 응달에는 하루가 지나도록 잔설이 남아 있다.
어찌하다 보니 저 잔설처럼 느긋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돼지사육업 불허가 처분에 불복해 업체가 곧장 행정소송을 제기하고 골치 아픈 새해가 펼쳐지리라 걱정했던 터다. 허나 어쩐 일인지 한 달 보름이 지나도록 눈에 띄는 움직임이 없다. 어쨌거나 행정소송에 대비해 주민서명운동을 시작하는 한편 ‘대기업 농업진출 규제’ 차원에서 농식품부에 정책대응을 촉구하는 공동행동에 나설 참이었다. 그런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발이 묶였다. 그래도 아쉬운 쪽은 우리가 아니니 급할 건 없다.
사실 말이지 ‘농한기’ 아니던가. 이 즈음이야 말로 일 년 중 가장 느긋한 시절이다. 쟁여둔 것들 야금야금 축내면서 몸을 눅이고, 다가올 농사철을 기다리는 때. 그러고 보니 이 뜻밖의 여유로움은 ‘이게 웬 떡이냐’가 아니라 본시 농사꾼 팔자였더란 말이다. 물론 일이 도져서 언제 또 다른 팔자타령을 하게 될지 모르는 형편이긴 하다만. 어쨌거나 한 시름 덜었다 치고 그야말로 농한기 모드가 되살아난 요즘이다.
무엇보다 기꺼운 것은 쌓아둔 책 더미의 먼지를 털어내는 일이다. 중뿔나게 뭘 탐구하는 게 아니라 그저 손이 가는 대로, 마음이 쏠리는 대로 집어 드는 것이다. 때로 책읽기 모임에서 선정한 텍스트도 좋은 핑계가 된다. ‘의무감’에서 시작하더라도 일단 지정도서를 읽다 보면 자연스렌 연관도서로 손을 뻗게 된다. 예컨대 ‘선비’에서 비롯된 여정이 사화-당쟁-실학을 두루 거쳐 끝내는 1천5백 쪽이나 되는 고전에 이르는 식이다. 무작정 떠나 내키는 대로 길을 잡는 무목적 여행이라고나 할까? 농한기이니 ‘주경야독(晝耕夜讀)’ 아닌 ‘주독야독(晝讀夜讀)’이 되는 셈이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주경야작(晝耕夜酌)’이 사실에 가깝다.
그렇다고 허구한 날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을 수도, 그저 노닥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고 좀 생산적인 일도 해야 할 터. 농한기라는 게 농사철이 다가오면서 시나브로 끝나게 돼 있으니 말이다. 자연과 인간세계의 섭리가 이러한 고로 진작부터 ‘농한기강좌’라는 걸 해오던 터다. 농한기에 농사철을 준비하는 것보다 생산적인 일이 또 있을까?
늘 해오던 대로 그 준비를 위한 1박2일 연찬모임을 다녀왔다. 벌써 달포 전 일인데, 올해도 고창 구시포 바다를 찾았다. 바닷바람 쐬고 내내 흥겨운 시간을 보냈지만 강좌를 어떻게 꾸밀지를 두고 열띤 토론도 벌였다. 하여 2월17일부터 격주 월요일에 ‘음악’ ‘책’ ‘적정기술’ ‘토종씨앗’ ‘벼농사’ 다섯 주제로 강좌를 열게 되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탓에 올해 대보름 잔치는 모두 취소되었고, 옛 밭농사두레 회원들끼리 조촐하게 오곡밥과 보름나물을 나누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이 겨울도 끝자락에 와 있다. 월간 <완두콩> 2020년 2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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