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7. 18:24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모내기 첫날, 이앙기 전조등을 밝혀 야간작업을 강행한 끝에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다. 뙤약볕도 뙤약볕이지만 기계 상태가 시원치 않아 속도가 나지 않은 탓이 컸다고 한다. 내가 손수 이앙기를 몰지 않았으니 기계 운전자의 얘기를 옮기는 것이다. 이앙기를 몰지 않았다면? 그렇다, 운전자에게 모판을 대주거나 이런저런 잔심부름이 내가 맡은 임부였다.
아니, 전업 농사꾼이라면 농기계를 다루는 게 기본 아닌가? 사실 나는 천하의 기계치로 소문나 있다. 트럭 하나 제대로 몰지를 못해 걸핏하면 길섶에, 뚝방길에 바퀴를 빠뜨리기 일쑤라 농번기엔 하루가 멀다 하고 보험사 긴급출동을 부르기 바쁘다. 몇 해 전에는 이앙기를 몰다가 기계와 함께 옆으로 풀썩 넘어지는 사고를 낸 뒤로는 농기계를 운전할 엄두를 내지 않고 있다. 또 어떤 대형 사고를 낼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까닭이다.
‘쌀 전업농가’에, 경작지가 웬만하면 트랙터-이앙기-콤바인 정도를 갖추고 손수 운행하는 게 기본이다. 고산권은 중산간이라 김제나 익산은 물론이고 삼례나 봉동에 견줘서도 논배미가 적은 편이다. 그러다보니 나처럼 1만평 농사를 부쳐도 ‘대농’이라고 쳐주는 게 보통이다. 물론 말 값이 부풀어 있긴 하다만.
게다가 우리 고산권벼농사두레로 보자면 독보적인 대농임에 틀림없다. 한 두 배미 부치는 소농들, 실은 소동도 못 되는 ‘마이크로농’들에 견주면 그 등치가 어마어마한 게 사실이지. 그러다보니 어쨌거나 농사에 관한 한 베풀고, 이끌어야 하는 처지다. 더욱이 벼농사두레로 묶인 이들의 농사라는 게 생계형이 아닌 취미농 또는 레저농 수준이니 사실상 하나부터 열까지 뒤를 봐줘야 하는 실정이다.
문제는 그 ‘대농’이 그에 걸맞는 ‘인프라’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트랙터-이앙기-콤바인은 그만 두고 하다못해 관리기 한 대도 없다. 트럭, 그리고 예초기가 우리 집에 있는 기계의 전부다. 그러니 마이크로농들에 필요한 기계작업을 대행해줄 처지가 못 된다. 아니 스스로가 대행작업의 수요자다.
결국 모든 기계작업 수요를 파악하고 종합해서 대행자를 물색하고 조정하는 구실이 ‘대농’인 내게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쉽지가 않다.
농사철에 임박해 지난해까지 논갈이-써레질(모내기를 위한 논배미 만들기)을 맡았던 작업자에게 관절부상이 생겨 더는 일을 계속하기 어렵다는 연락이 왔다. 어쩌겠는가.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어렵게 대체작업자를 찾아 겨우 모내기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이앙기 운행. 지난 7년 동안 이앙기를 몰아준 작업자도 “이제는 기력이 딸려 올해까지만 하고 내년부터는 못 한다”고 한다. 오늘 모내기를 하면서 이리저리 구슬려봤지만 요지부동이다. 벌써부터 내년이 걱정이다. 그래도 생태가치에 바탕을 둔 벼농사가 시대의 요청이니 만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으리란 믿음이 있다. 이리 숱한 이들이 바라는데 설마 하늘이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하여 ‘대농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게 기계 작업자의 ‘시다바리’ 노릇에, 취미농들의 이런저런 민원을 아우르고 급할 때는 아예 대신해주느라 종종거리지만 그것이 그리 언짢지는 않다.
이앙기가 까탈을 부리지 않고 순조롭게 작업이 이어지면 모레쯤 모내기가 마무리된다. ‘모농사가 반농사’라 했고, 모내기까지 마치면 이제 벼농사는 하늘에 맡기게 되는 셈이다.
또 한 번 큰일을 치렀으니 다시 잔치다. 이번엔 유월의 밤 ‘가든 파뤼’. 월간 <완두콩> 2021년 6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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