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10. 10:59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올해는 어찌하다 보니 혼자서 김장을 해치웠다. 가히 ‘독거노인 김장독립’이라 할만하다.
처음부터 그러려던 건 아니다. 김장이라는 것이 워낙에 한해 먹거리를 장만하는 거라 무척 큰일이고 품도 많이 드는 법이다. 해서 저마다 여건이 되는 대로 이웃끼리 품앗이를 하거나 식구들이 모여 해치우는 게 보통이다. 우리도 그새는 오누이 네 식구가 어머니 댁에서 함께 김장을 해오던 터였다.
물론 무 배추는 어머니가 텃밭에서 손수 기른 것이다. 늦여름부터 모종 사다가 심고 때맞춰 거름 주고 물주며 정성을 쏟은 놈들이다. 양념을 장만하는 일 또한 모두 어머니 몫이다. 고춧가루와 마늘, 생강, 쪽파 같은 풋것부터 소금, 젓갈, 액젓 같은 가공품까지. ‘애들’은 그저 어머니의 지휘에 따라 어마어마한 양념을 뒤섞고, 절인배추 나르고, 속을 치대고, 이러저런 허드렛일을 맡는다. 핑계 김에 생굴에, 보쌈에 잔치판을 벌인 뒤 저마다 제 몫의 김치통을 챙겨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사정이 그러질 못했다. 김장철 즈음에 어머니가 덜컥 탈이 난 것이다. 가을걷이를 하느라 무리를 했는지, 아니면 여든을 훌쩍 넘긴 노구 탓인지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일주일 남짓 병원 신세를 진 것이다. 퇴원한 뒤로도 홀로 몸을 가누기 어려운 탓에 맏딸 집에 모시게 됐다. 그러니 예전같은 김장잔치는 물 건너간 셈이다.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애써 가꿔놓은 무 배추가 걱정이 되었는지 가까이 사는 내게 넌지시 얘기를 꺼내는 것이다. 어렵게 장만해둔 고춧가루며 양념거리도 아깝다 하고. 틈을 내서 화물차를 몰고 어머니 댁으로 갔다. 텃밭을 둘러보니 무는 그럭저럭 봐줄 만한데 배추는 그 풍신이 말이 아니다. 올해는 다들 배추농사를 망쳤다고 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제대로 된 게 절반도 안 돼 보이는 거다. 그래도 그냥 내쳐둘 순 없으니 무는 뽑아서 땅 속에 묻고, 배추는 속이 찬 놈으로만 스무 포기 남짓 솎아 집으로 실어왔다.
총각무와 함께 이웃에게 나눠줄 요량이었는데 알고 보니 다들 김장을 끝낸 터다. 어머니의 정성이 깃든 것들인데... 달리 길이 없으니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일을 저지르는 수밖에 없지 싶었다. 인터넷을 뒤져 김장 레시피를 정하고 읍내 마트에서 양념거리를 챙겨왔다.
일단 배추 절이기부터. 한 포기씩 반으로 쪼갠 뒤 달걀을 띄워 염도를 맞춘 소금물에 적셔 고무통에 가지런히 앉히고 소금을 듬뿍... 배추를 절이면서부터 괜한 짓을 저질렀다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기왕 시작한 것, 가는 데까지 가보자 했다. 늦은 밤 시간에 절인 배추를 행구고 밤새 물을 뺄 요량이었는데 어라? 그 때까지도 배추가 탱탱하다. 하는 수 없이 잠을 설친 채로 새벽에 일어나 그 짓을 해야 했다.
준비한 양념거리를 썰고, 갈고, 육수를 끓이고, 찹쌀 풀을 쑤어 김장 속을 만드는데 어찌나 잔손이 많이 가는지. 거실에 쭈그리고 앉아 치대다 보니 옷이며 바닥이며 여기저기 시뻘건 양념이 묻어나고 난장판이 되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스무 포기 배추김치를 담고 나니 속이 다 떨어졌다. 아뿔싸, 총각김치! 그냥 버릴 수 없으니 양념 다시 만드는 수밖에.
이웃에 맛보기를 돌려야 마땅한데 제대로 담가졌는지 자신할 수 없으니 낭패인거라. 쭈뼛쭈뼛 건넸는데 무안한 상황은 아니어 그나마 다행이다. “젓갈이 좀 세긴 하지만 초보 치고 잘 하셨네요~” “차주부님으로 인정!”
느닷없이 잔치에서 ‘전쟁’으로 돌변한 올해 김장의 전말이었다. 월간 <완두콩> 2021년 12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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