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14. 13:20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해가 바뀐 지 열흘 남짓 지났다. 늘 하는 얘기지만 농사꾼에게 양력으로 치는 새해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이 즈음은 자연계로 봐서도 ‘새롭다’ 할 무엇을 찾기 어려운 때고 세상사 또한 마찬가지다. 기껏해야 달력이나 다이어리가 바뀌는 정도로 새해를 느낄 뿐인 것이지.
음력으로 쇠는 설은 되어야 진짜배기 새해를 맞게 된다.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하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올해는 뜻하는 일 꼭 이루시라 따위 덕담을 건네받으며 비로소 해가 바뀌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농사꾼으로서도 그날부터 대보름 어간에 날이 풀리면서 차츰 몸을 풀고 새 농사를 가늠해보는 것이다.
실제로도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 지난해 마지막 날 강원도에 사는 벗이 먼 길 마다 않고 찾아왔더랬다. 오랜만의 만남이라 쌓인 얘기를 풀어내느라 늦도록 통음을 하다 보니 새해 첫날 해가 중천에 떠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쓰린 속을 읍내식당 해장국으로 달래고도 새해 첫날 하루를 몽롱하게 보내야 했다. 새벽녘에 천호성지 뒷산에 올랐다며 이웃집 아낙들이 보내온 멋진 일출사진을 보고도 감흥을 느낄 여지가 없던 것이다. 새해가 뭐 이래?
가뜩이나 ‘희망가’를 부르기 어려운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 삶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은 코로나19 팬데믹이 3년째로 접어들어 언제쯤 이 어두운 터널을 벗어날지, 아니 벗어날 수는 있는 것인지 아득하기만 하다. 이제 4차인지, 5차인지도 헛갈리는 대유행 국면은 조금씩 가라앉는 듯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거리두기’ 강화에 따른 고통의 대가일 뿐인 듯하다. 사실 말이지 코로나가 아니라도 세상은 엉망진창이다.
공사 중이던 고층 아파트가 무너지고, 냉동창고에 불이 나고, ‘위험의 외주화’에 내몰린 노동자는 고압전류에 감전돼 희생되고... 하루가 멀다 하고 믿기지 않는 사고가 꼬리를 문다. 그저 우연으로 돌릴 수만은 없는 ‘구조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이래저래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 행복은커녕 절망의 낭떠러지로 내몰리는 듯하다. 그러나 이 와중에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전은 새로운 대안이나 희망 대신에 ‘덜 나쁜 놈’을 찾아야 하는 괴로움만 안겨주는 양상이다. 하루하루 넌덜머리나는 ‘소음’에 시달리다 보면 대선국면이 어서 빨리 끝났으면 싶은 게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이 고장의 형편도 을씨년스럽긴 마찬가지다. 건강회복을 위해 화산 산골로 귀촌한 부녀의 보금자리 바로 옆에 축사를 짓자 이에 항의하는 여성을 경찰이 난폭하게 ‘제압’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고산 남봉리 돼지분뇨 처리장 문제가 꼬이는 등 환경현안이 넘쳐난다. 동네 톡방에서는 이런 저런 이슈를 놓고 날선 공방이 끊이지 않는다.
이 참에 톡방 소통에 대한 생각을 밝히자면 이렇다. 특정 현안을 지역여론에 호소하는 행위는 탓할 일이 전혀 아니고 되레 여러 의견을 수렴해 합일점을 찾는 훌륭한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그 과정이나 태도일 텐데, 독선적이거나 무례한 의사표현이 난무하게 되면 지켜보는 이들은 피로를 느끼고 기대와는 달리 역효과를 부르고 만다. 그렇더라도 다양한 경험과 사례가 쌓이다 보면 결국은 소통의 질서가 잡힐 것이다.
어쨌거나 새해 첫머리는 이렇듯 어수선하기만 하다. 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들 풀릴 리 만무하다. 그러니 안으로 안으로만 움츠러들 밖에. 세상사와 거리를 둔 채 궁극의 이치를 찾아나서는 구도의 여로. 묵언수행 또는 면벽수도? 이맘 때 쯤 꼭 걸리는 계절병이라면 계절병이겠다. 월간 <완두콩> 2022년 1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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