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뎌낸 자의 '논둑길 산책'

2023. 8. 11. 15:29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마음을 졸이게 했던 제6호 태풍 카눈이 이 고장을 스쳐 지나갔다. 느린 속도로 한반도 내륙을 관통해 내일쯤 소멸될 거란 소식이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큰 피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다행이다.

 

이번 태풍이 아니라도 이번 여름은 미쳐 날뛰는극한기후에 치여 온통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극한폭우를 동반한 장마가 한 달 가까이 반도를 할퀴어 커다란 생채기를 남겼더랬다. 장마가 끝나자 이번에는 연일 35도를 넘나드는 극한폭염이 보름 가까이 이어졌다. 날이면 날마다, 아침나절부터 푹푹 쪄대니 당최 견딜 재간이 없었다. 태풍이 몰고 온 빗줄기가 열기를 가라앉혀준 덕분에 그나마 한숨을 돌리고 있다. 마침 입춘도 지났고 하니 그 여세를 몰아 무더위가 한풀 꺾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실로 일상이 멈춰버린 채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더랬다. 7월 중순, 동상계곡에서 물놀이로 진행하려던 벼농사두레의 양력백중놀이는 폭우가 계속되면서 한 차례 연기됐다가 그예 취소되고 말았다. 장맛비가 그치지 않는 데다가 전국을 휩쓴 극한폭우에 많은 인명피해가 난 상황에서 물놀이를 강행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이 판국에 그깟 물놀이가 문제겠는가. 온종일 비가 쏟아지는 통에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논바닥을 말려 헛새끼치기를 막고 뿌리에 공기를 불어 넣는 중간물떼기를 해야 하는데 허구한 날 장대비가 쏟아지니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게다가 햇볕 한 줌 없는 나날이 이어져 온통 축축하고 눅눅해서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오랜 장마가 끝나고 햇볕이 쨍하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논바닥이 시나브로 말라가 마음도 보송보송한 느낌.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닷새가 되고 한 주를 지나 열흘을 넘어 푹푹 쪄대니 당최 견딜 재간이 없다. 장마에 녹작지근해진 심신이 이번엔 극한폭염에 들볶이어 불쾌지수가 치솟고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겨운 지경.

 

사람만이 아니라 가축을 비롯해 숨이 붙은 것들에겐 무척 힘든 시간이었다. 온열질환자가 속출한 것은 물론이고 물난리에 익사하고, 폭염에 폐사한 가축만도 수십만을 헤아린다고 한다. 갈수록 악화되는 기후위기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를 보여주는 전조들이라 하겠다.

 

반면 햇빛 에너지를 합성해 생존하는 식물에게 장마 뒤에 찾아온 불볕더위는 무척 반가운 손님이다. 삽시간에 숲과 들은 더욱 짙푸르러지고 논두렁의 잡초도 밀림처럼 우거졌다. 논배미에 자라는 벼도 마찬가지. 장마철 궂은 날씨의 일조량 부족을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 내리쬐는 땡볕을 흠씬 빨아들인다. 하여 벼포기는 쑥쑥 자라 허리춤에 가깝고, 들녘은 이제 검푸른 빛으로 일렁인다.

 

볏대를 몇 가닥 뽑아 갈라보니 어느새 아기이삭(유수)이 들어차 있다. 지금은 솜털 같은 모양이지만 머잖아 볏대는 불룩해지고 곧이어 이삭이 고개를 내밀 것이다. 그것이 지구열대화’-이상기후 속에서도 생명력을 이어가는 대자연의 섭리다. 인류의 탐욕이 빚어낸 기후위기로 동물계가 멸종하더라도 지구는 이런 설리를 따라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낼 것이다. 어찌 보면 장마철의 극한폭우, 뒤이은 극한폭염, 이번 태풍의 갈지자 행보는 그 경로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리라. 그러니 대자연이 보내는 경고음에 예민해야 하겠다. 그 신호 앞에 겸허해져야 한다.

 

우리 벼두레는 이번 광복절 휴일을 맞아 샘골 논배미를 둘러보기로 했다. 이름하여 논둑길 산책’. 그 즈음 고개를 내밀 벼이삭은 우리에게 어떤 얘기를 속삭일까 궁금하다. 월간 <완두콩> 2023년 8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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