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15. 10:27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지나오니 꿈만 같다. 초반 모농사 공정을 무사히 마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올해 벼농사는 그 어느 해보다 마음을 졸이면서 시작했고, 내내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노심초사의 나날이었다. 지난해 모농사를 망치고 두 번 일을 해야 했던 기억 탓이다. 해오던 대로 볍씨를 걸러 냉수침종을 거쳐 못자리에 앉혔지만 끝내 싹을 틔우지 못했던 악몽 말이다. 설마 같은 실패를 되풀이할까 싶기도 했지만 그 트라우마가 워낙 깊었던 모양이다.
‘고산땅기운작목반’에서도 지난해까지는 열탕소독을 거친 볍씨를 공급해왔으나 처리 과정에서 과열을 우려한 나머지 올해는 소독작업을 각 농가에 맡겼다. 이에 따라 볍씨 담그기에서 열탕소독 공정이 늘어난 셈이 됐다. 그 작업이야 섭씨 60도에 물에 10분 동안 자맥질하면 되니 그리 부담되는 일은 아니다.
문제는 기계로 작동하는 발아 작업. 이틀 동안 일정한 온도(섭씨 32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전기로 돌아가는 발아기의 오작동이나 단전사태 따위가 빚어질까 싶어 하루에도 몇 번 씩 기계작동을 확인하는 초긴장 상태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걱정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볍씨는 알맞게 촉이 텄다.
그 다음은 볍씨 넣기. 역시 전기로 작동하는 기계를 써서 모판에 볍씨를 파종하는 작업이다. 이 또한 기계작동이 관건이다. 파종기는 콘베어 시스템으로 작동하는데 오작동으로 볍씨나 상토가 제대로 주입되지 않거나 모판이 기계에 끼어 작동을 멈추는 일이 벌어질 수 있어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어쨌거나 파종작업 또한 별 탈 없이 마칠 수 있었다.
초반 모농사의 마지막 공정은 못자리 만들기. 파종작업을 마친 모판은 사나흘 동안 숙성시킨 뒤 못자리에 앉히게 된다. 우리 벼농사두레는 전통적인 물못자리 방식을 쓰는데, 로터리를 친 논배미에 물을 잡아 두둑을 만들어 그 위에 모판을 가지런히 앉힌다. 품은 많이 들지만 한 번 조성하면 며칠에 한 번씩 물을 대주면 그만이라 관리가 수월하다. 또 하나, 흙 속의 미량요소를 양껏 빨아들임으로써 튼튼한 모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올해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경작면적이 늘어나는 바람에 필요한 모판도 그만큼 늘었다. 파종기는 속도를 조절할 수 없는 시스템이라 모판 수가 늘어나면 작업시간도 비례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기계를 멈추지 않고 최대한 작동시키는 게 시간을 버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바람에 올해는 휴식시간에도 기계를 끄지 않고 조를 나눠 쉬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 두레 작업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일을 마쳐야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다행히 작업은 늦지 않게 마무리됐다.
못자리 작업 때는 폭우가 예보되는 바람에 작업 참여 인원도 여느 해보다 적었다. 실제상황은 요란한 일기예보만큼은 아니었지만 수시로 장대비가 쏟아지는 악조건 속에서 작업을 진행해야 했다. 인원은 줄고 일감은 늘어난 데다 날씨마저 애를 먹이니 제시간에 끝내려면 노동강도를 높이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 볼멘소리와 푸념이 요란했지만 그저 시늉일 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다들 이심전심으로 알고 있다. 그 덕분에 못자리 작업 또한 해가 지기 전에 끝낼 수 있었다.
그래서 꿈만 같은 것이다. 다행히 볏모는 제대로 싹을 올리고 잘 자라 생육상태가 좋은 편이다. 부직포를 젖히면 드러나는 짙푸르고 탐스런 볏모. 이보다 예쁜 풋것이 또 있을까? 월간 <완두콩> 2023년 5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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