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는 끝을 맺고

2023. 11. 4. 14:41누리에 말걸기/<낭만파 농부>

[낭만파 농부] 햅쌀밥, 설렘과 행복
    2023년 10월 31일 03:57 오후
 

 

가을걷이를 모두 끝냈다. 올해는 콤바인(수확기계) 작업을 대행해 준 장 선생이 우리 벼두레를 깍듯이 배려해준 덕분에 지난해보다 일찌감치 마무리됐다. 짐짓 홀가분하지만 그렇다고 ‘수확의 기쁨’까지 가벼워진 건 아니다.

‘첫수확’의 설렘을 안고, 벼이삭 넘실대는 논배미를 배경 삼거나 그 안에 훌렁 뛰어들어 기념사진을 찍기에 바쁘던 시절이 있었다. 벼포기를 꽃다발 삼아 졸업노래 가락에 맞춰 “빛나는 햇나락을 터신 언니께…” 흥얼대던 해도 있었지. 풍요로워진 마음에 새참 거리를 바리바리 싸들고 오던 정겨운 모습도.

그러던 이들에게 차츰 농사 연륜이 쌓이면서 가을걷이 풍경도 더러 바뀌게 마련이다. 연륜은 능력을 키우고 안정감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일하는 재미나 설렘을 시나브로 앗아가기도 한다. 이제 새내기 한둘을 빼고는 거둬들이는 자의 벅찬 표정을 보기가 힘들더라는 얘기다. 제 논배미 수확하는 차례가 되어도 이러저런 핑계로 나타나지 않는 일이 생길 만큼 심드렁한 경우까지.

이에 견줘 농사의 가치를 중시하는 교육철학으로 운영되는 ‘코끼리유치원’(벼두레 단체회원)은 다르다. 난생처음 콤바인이 벼포기를 먹어가는 장면을 논두렁에 줄지어서 바라보다가 연신 탄성을 질러댄다. 지난봄에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손수 모내기를 하고, 이따금 찾아와 잘 자라고 있는지 살펴왔던 벼가 누런 이삭을 맺어 거둬들이는 모습이 신기하고 스스로 뿌듯하기도 할 것이었다. 얼마 뒤에는 거둬들인 나락이 방앗간에서 흰 쌀로 둔갑하는 현장을 견학하게 될 것이다.

코끼리유치원 ‘꼬마 농부들’이 가을걷이 장면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가을걷이는 끝을 맺었다. 사실 걱정이 많았다. 가을장마, 올해는 벼 이삭이 익어갈 무렵부터 무시로 비가 내린 탓이다. 작황을 좌우하는 일조량이 모자랄 뿐 아니라 습한 환경에서 깨씨무늬병, 도열병 같은 병충해가 크게 번졌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수확을 해보니 소출은 지난해와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정말 다행이다. 더러 도열병이 크게 번져 소출이 크게 줄어든 회원도 없지 않은 건 아쉬운 부분이다.

어쨌거나 가을걷이가 끝났으니 추수동장(秋收冬藏)이라고, 이제 갈무리 해두고 겨우내 야금야금 빼먹을 일만 남은 것인가. 아니지, 기쁨이란 나눌수록 커지는 법이다. 연륜이 쌓이면서 거둬들이는 일이 무덤덤해졌다 하더라도 수확의 기쁨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 기쁨은 나눔으로써 더 커진다.

왜 아니 그렇겠나. 시골에 사는 낙으로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맑은 공기 따위를 꼽을 수 있지만 손수 짓는 농사도 빼놓을 수 없다. 작은 논배미 하나 구해서 손수 모를 길러 심고 가꾼다. 여럿이 함께 짓는 재미도 쏠쏠하다. 왁자지껄 웃어 재끼다 보면 일이 힘든 줄도 모르고, 모정에서 함지박에 썩썩 비벼 먹는 점심과 새참도 꿀맛이다. 삐끗하면 빽빽이 올라는 잡초 때문에 곤욕을 치를 때도 있지만 지나고 나면 그것도 추억이 된다.

그렇게 거둬들인 나락 방아를 찧으면 갑자기 ‘쌀부자’가 된 기분이다. 조금씩 나눠 이분 저분, 이 친구 저 친구에 나눠 보낸다. “이거 땀 바가지나 흘려가면서 손수 지은 쌀이니 맛이나 좀 보시라”고 건네거나 택배를 보내노라면 가슴이 뿌듯해진다. 그러고도 쌀이 남으면 여기저기 팔아도 본다. 멋지지 아니한가.

물론 쌀을 팔아 생계를 꾸리는 나 같은 전업농은 얘기가 다르다. 한 명이라도 소비자를 더하고, 하나라도 판로를 늘려 어떻게든 거둬들인 나락을 팔아치워야 한다. 하지만 갈수록 쌀 소비가 적어지고, 집밥 해 먹는 일도 줄어드니 그게 녹록치가 않다. 그런 가운데서도 10년 넘게 버텨왔으니 스스로 대견해진다.

아무튼 거둬들일 게 넘쳐나고 마음도 너그러워지는 시절. 햅쌀밥은 그 상징이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고 반찬 없이도 꿀맛인 햅쌀밥. 벼두레는 이번 주말 그 햅쌀밥을 나누는 잔치는 벌인다. 올해는 또 어떤 즐거운 소동이 벌어질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첫방아 찧은 쌀을 트럭에 싣고

*<낭만파 농부> 연재 칼럼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