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25. 10:40ㆍ누리에 말걸기/<낭만파 농부>
‘올해 마지막 쌀’. 소비자한테 택배 보낼 때 동봉하는 안내문 제목이 오늘부터 바뀌었다. 다음달, 그러니까 9월 중순께가 되면 준비한 쌀이 얼추 소진될 듯하다. 다른 해와 견주어 일찌감치 장을 마감하는 셈이 된다.
올해 초만 해도 쌀 주문이 심상치가 않았더랬다. 끝내 남아돌까 걱정이 되어 생각다 못해 ‘맛있게 드시고 주변에 널리 홍보 부탁드린다’는 내용을 택배발송 안내문에 덧붙여 보냈다. 그런다고 문제가 풀릴까마는 지푸라기라도 부여잡는 심정이었던 것.
그 소식을 전해들은 벼농사두레 도반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리저리 선이 닿는 대로 판매를 주선해준 ‘구원의 손길’ 덕분에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그 마음 씀씀이가 여간 귀하지 않고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다. ‘조기품절’이 임박한 데에는 그런 사연이 숨어 있었다. 하여 오늘 택배상자에 넣어 보낸 안내문구는 짐짓 여유가 묻어나게 되었다.
지금 논배미에는
검푸른 물결이 일렁입니다.
한여름 뜨거운 햇볕을 쬐고
쑥쑥 자란 벼포기들이
억센 생명력을 내뿜는 현장!
어느덧 벼 이삭도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익어갈수록 조금씩 고개를 숙이겠지요.
그리고는 튼실한 나락으로
마침내 빛나는 쌀로 거듭날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새뜻한 햅쌀이 찾아올 그날~
‘극한’에 앞에 붙은 폭우와 폭염을 이겨내고 올라온 벼 이삭이 대견하기만 하다. 이 시간, ‘처서’ 이름값 하느라고 무더위를 가라앉히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처서에 비가 오면 십리에 천 석 감한다’는 속담이 아니라도 전혀 반갑지가 않다. 이삭이 패고, 벼꽃이 피어 가루받이를 하는 때에 내리는 비가 이로울 리 없는 탓이다.
하긴 1년 365일 내내 좋은 일만 넘쳐나면 무슨 재미인가 싶기도 하다. 비봉 돼지농장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어 한 동안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다가, 둘째 녀석 군입대 통지서 받고 싱숭생숭한 날을 보내다가, 뜻밖에 쌀이 조기절판 되어 시름을 덜었더니, 오늘 달갑잖은 처서비가 내린다.
지난 광복절 휴일 펼쳐진 벼농사두레 ‘논둑길 산책’. 예보와 달리 온종일 무더웠다. 게다가 시작 직전에는 소나기까지 내리는 바람에 사람들의 발길이 크게 줄었다. 그나마 오래지 않아 비가 그쳐 약식으로나마 준비한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실은 장마와 폭염 탓에 뜸했으니 만남의 핑계로 준비된 측면이 컸다. 오랜만에 저녁을 함께하며 쌓인 회포를 풀 수 있었다.
앞으로 열흘 뒤면 또 돼지농장 완전해결 축하잔치가 걸판지게 벌어지는데 그 준비 때문에 요즘 눈코 뜰 새가 없다. 면 단위를 넘어 군 단위를 아우르는 규모의 잔치다 보니 만만치가 않다. 잔치를 알리는 현수막을 내다 걸고, 여기저기 기별하여 초청하느라 바쁘다. 잔치음식 맞추고, 행사장과 준비물품 점검하고, 이런저런 프로그램 기획하다 보면 십 수 명이 달려들어도 벅찬 노릇이다. 여기에 지난 8년의 발자취를 남기자며 보고서와 영상물까지 제작하기로 해 머리를 쥐어 짜내야 하는 형편이다. 그렇게 기껏 준비한 잔치판이 썰렁하면 또 안 되니 참석을 독려하느라 노심초사다. 큰 행사를 앞두고 펼쳐지는 뻔한 풍경이긴 하다.
장마와 폭염으로 오래도록 발이 묶였던 올여름, 그걸 만회라도 하려는 듯 그 막바지에 숨이 가쁘다. 하긴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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