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28. 10:12ㆍ누리에 말걸기/<낭만파 농부>
뒷산을 오르는 발걸음이 무겁다. 첫 오르막부터 허벅다리가 뻐근해 오니 말이다. 어제 등산모임 ‘사니조아’를 따라 해발 8백 미터 넘는 월여산을 타고 온 후유증이겠다. 벼농사가 얼추 끝물에 접어드는 초가을부터 운동 삼아 매일 뒷산을 타는데 사니조아 등산에는 달포에 한 번 남짓 함께 하는 편이다.
물론 농사철에는 마음을 내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농사일만으로도 몸뚱이가 너무 버거운 까닭이다. 일이 할랑해지고 농한기에 들어서야 건강을 챙기는 일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된다. 별일 없으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뒷산을 오르고 등산모임에도 따라 나서는 것이다.
어제는 당일치기 산행이라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약속시간을 넘겨 헐레벌떡 내닫다 보니 스스로 쳇바퀴를 열심히 도는 다람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한 해 단위로 정해진 코스를 따라 도는 쳇바퀴 인생이 맞지 싶다. 농사철이야 꼼짝 없이 벼의 생장주기에 맞출 수에 없는 처지. 볍씨를 담그는 것으로 농사를 시작해 가을걷이할 때까지 반년 세월은 당최 거기서 벗어날 길이 없는 셈이다.
농사가 마무리되면 나머지 반년 동안 농한기가 이어지게 된다. 처음 몇 해는 이 무한대로 펼쳐진 ‘자유시간’만으로도 황홀경에 빠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한 10년 넘게 겪어보니 이 또한 어떤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더라는 거다. 가을걷이 끝날 즈음 산야에 단풍이 물들다가 낙엽이 지고, 얼마간 된서리가 앉더니 어느 날 첫눈이 내리고…
아, 올해 첫눈이 내린 것은 ‘벼두레배 당구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재미난 놀 거리를 찾아 궁리하던 끝에 동네 당구클럽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당구클럽 중심으로 ‘대회조직위원회’를 꾸려 준비에 들어갔고 최종적으로 열 명 남짓 참가했다.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로 나눠 경기를 펼쳤는데, 40년 당구경력에도 만년 50점을 놓는 나는 그날 큐대를 처음 잡아보는 여성 참가자 두 명과 더불어 풀리그 접전을 펼쳤다. 그나마 2전2패로 꼴찌. 각 리그 우승-준우승자는 벼두레가 마련한 농산물 상품을 챙겼고, “당구 치고 나선 짜장면이 진리”라나 뭐라나 중국집으로 향했고.
어쩌면 ‘일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첫눈이 내리고’에 이어지는 내러티브는 ‘설국에 갇힌 농사꾼은 어쩔 수 없이 동안거에 들어가게 되었다’로 이어져야 마땅한 그림 아니던가. 그런데 당구대회가 열리는 날 하필 첫눈이, 그것도 수북하게 내릴 줄을 어찌 알았으리오. 게다가 눈이 내리면서 바로 녹은 뒤 얼어붙는 바람에 차도까지 엄금엉금 걸어 나가야 했지만 막상 경기가 펼쳐지자 다들 승부욕에 불타 반나절이 휙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번엔 당구를 쳤으니 다음엔 볼링으로 하죠!” 어렵지 않게 의기투합이 되었고, 누군가 나서 ‘벼두레배 볼링대회’ 조직위원회를 꾸릴 것이다.
쳇바퀴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한 달 단위로 돌아가는 월급쟁이에 견줄 바는 아니다. 일주일마다 돌아오는 휴일과 얼마간의 휴가를 통해 일탈을 꿈꾸는 자들. 그런데 쌀 전업농의 농한기는 무려 반년이나 된다. 해마다 그 긴 세월의 ‘일탈 프로그램’을 짜내야 하는 일, 그야말로 고역이 아니겠나 이 말이다.
안 그래도 또 하나 준비 중이다. <농한기 영화제>라고, 애초 완주미디어센터 주최로 일주일 동안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프로그램인데 올해로 다섯 번째를 맞는다. 명색이 ‘농한기’인데 우리 벼농사두레를 빼고 될 일이냐 싶어 공동주최를 제안했더니 그 자리에서 좋다고 했다. 실무준비야 센터가 해오던 대로 하면 되고, 벼두레로서는 후보작 중에 회원투표로 최종 상영작 다섯 작품을 선정하고, 함께 영화를 보고 소감을 나누는 기쁨을 누리면 되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가 돈이 없지 핑계가 없냐?”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재밌는 일도 한 두 번이고, 이것저것 하도 많이 벌였더니 이젠 핑계를 찾기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건 ‘새로운 핑계’가 아니라 핑계를 찾아낼 ‘새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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