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벼농사를 지어보자

2024. 3. 12. 12:31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아직 꽃샘추위가 더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만 들녘엔 봄기운이 뚜렷하다. 뜰앞의 매화가 첫 망울을 터뜨린 게 경칩이던 며칠 전이다. 같은 고장이라도 자리에 따라 또는 품종에 따라 꽃피는 시기가 조금씩 다르긴 하다. 울안의 매화는 늘 그 자리를 지켜왔으니 날씨의 흐름이 지난해와 엇비슷함을 알겠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러저러하게 통하는 것일까. 바로 그날 동네 단톡방에 화암사 나들이를 알리는 벙개가 떴다. 느긋한 시절이고, 마침 달리 볼일도 없어 길을 나섰다. 조금은 쌀쌀한 날씨라 단출한 나들이가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뜻밖에도 여섯이나 모였다.

 

절로 가는 들머리에는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얼마 전 내린 비 때문인지 계곡물은 유량이 제법 되었고, 곳곳에 뭉게뭉게 개구리 앞이 실려 올챙이로 깨어나려는 참이다. 샛노란 꽃을 매단 복수초는 어느새 꽃대가 한 뼘 넘게 자랐고 짙푸른 잎이 수북하다. 얼레지는 진보랏빛 무늬가 점점이 박힌 넓적한 잎사귀 위로 뾰족한 꽃대를 올렸고 당장이라도 그 요염한 꽃잎을 피워낼 기세다.

 

수백년을 묵묵히 늙어온 화암사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적묵당 툇마루에 걸터앉아 바라보는 불명산 능선 위 파란 하늘도 예전 그대로다. 벌렁 누워 렌즈를 들이대면 산자락과 허공은 역삼각형 프레임에 갇힌다. 그 속에서 영겁의 세월이 교차한다.

 

지난겨울은 어느 해보다 어수선했다. 많은 일들이 복작거렸고 그런 만큼 속 시끄럽기 이를 데 없었지. 두문불출, 웅크리다가도 때맞춰 기별을 해오는 벗들이 있어 어느 날은 해지는 낯선 포구에서, 또 다른 날엔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입산이 통제된 산자락, 고찰의 사하촌에서 낯선 바람을 맞기도 했더랬다.

 

지나온 세월은 그렇게 기억 또는 추억이라는 조각으로 남게 되는 것일까. 날이 갈수록, 끝에 가까울수록 초연하고 관조해야 하거늘. 여전히 비우고 내려놓지 못하고 바둥거리는 삶이 스스로 비루해지던 그 겨울의 끝자락, 이제 마침표를 찍을 때다.

안 그래도 농사철이 머지않았다. 농사라고 해봤자 오직 벼농사뿐이고, 볍씨를 담그려면 아직도 달포는 더 지나야 하지만 먼저 마음이 바빠지는 법이다.

 

그런데 올해는 함께 유기농 벼농사를 지을 도반들이 줄어들까 걱정이다. ‘벼농사두레 경작회원을 두고 하는 얘기다. 생계를 위해 벼농사를 짓는 쌀 전업농은 사실상 나 혼자고, 나머지는 한 두 배미씩 내 먹을 쌀 내가 짓는 경우다. 그런데 지난해는 삼산도가팀이 합류했다. 얼마전 <고산탁주><고산약주>라는 제품명으로 출시된 고품격 양조주를 만드는 이들이다.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손수 지은 깨끗하고 건강한 쌀로 좋은 술을 빚는다는 아름다운 뜻이 담겨 있다. 소요되는 멥쌀과 찹쌀이 상당하니 경작지 또한 꽤 넓다.

 

이에 따라 벼농사두레 차원의 경작면적도 지난해부터 부쩍 늘게 되었다. 이렇듯 경작면적이 늘어난 반면 이런저런 사정으로 경작을 그만두거나 쉬어가겠다는 이들이 제법 생겼다. 직장이나 가게 일이 바빠졌거나 체력의 한계를 절감하는 경우다. 줄어든 만큼 경작자가 새로 합류하지 않으면 두레작업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벼두레에서 조만간 경작설명회를 크게 열어 새로운 경작자를 공모하기로 한 모양이다.

 

권하노니! 자연 속에서 이웃과 함께 유기농 벼농사를 지어, 내 먹을 쌀을 손수 빚어내는 일이야말로 시골에 사는 특별한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월간 <완두콩> 2024년 3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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