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13. 11:05ㆍ누리에 말걸기/<농촌별곡>
주뻐야소.
낮에는 뻐꾸기, 밤에는 소쩍새라. ‘뻐꾹 뻐꾹 봄이가네~ 뻐꾹 뻐꾹 여름 오네~’ 계절이 바뀌는 소리. “솥/적/다”고 풍년을 예고하는 애절한 울음. 어쨌거나 벼농사가 시작됐다는 신호 되시겠다.
안 그래도 우리는 5월 첫머리를 모농사로 수놓았다. 볍씨를 담가 싹을 틔워 파종한 모판을 못자리에 앉히는 한 주 남짓한 두렛일이 끝난 것이다. 뜻하지 않은 어려움으로 애를 먹기도 했지만 마무리는 아름다웠다. 못자리에는 지금 앙증맞은 볏모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볍씨 담그는 공정부터 문제가 생겼다. 소금물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염수선 작업은 가뿐했다. 처음 해보는 새내기 일꾼들에게는 날계란을 띄워 염도를 맞추는 과정부터가 신기한 경험이었을 터. 막걸리 잔으로 목을 추겨가며 여유잡고 그 다음 열탕소독을 하려는데... 아뿔싸! 소독기에 딸린 보일러가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장정 대 여섯이 힘들게 옮겨온 기계인데 워낙 낡은 탓으로 보였다. 삭아서 물이 새는 파이프를 갈아 끼우고, 저마다 경험과 기술을 짜내봤지만 결국 보일러 작동에 실패. 밤 9시가 넘은 시간이라 열탕소독 공정을 건너뛰고 발아기를 돌릴 수밖에.
다행히 볍씨는 알맞게 촉이 텄고 사흘 뒤에는 모판에 볍씨를 넣는 작업이 이어졌다. 전기로 돌아가는 파종기계를 쓰는 공정이다. 7~8명이면 너끈히 작업할 수 있는데 열 댓이 모였다. 문제는 일관 공정을 제어하는 체인에 문제가 생겨 자꾸만 가동이 멈추는 것이다. 그런 탓에 작업시간이 늘어질 수밖에 없었고 저녁 7시를 넘겨서야 겨우 마무리가 되었다. 2천 판이 넘는 숫자도 숫자려니와 체력소모가 가중돼 집중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메벼와 찰벼가 섞이는 사고가 터져 찰벼모판 수를 줄여야 했다.
그렇게 사나흘을 숙성하여 싹을 돋은 뒤 못자리에 앉히는 작업에 들어갔다. 5월1일, 노동절이었다. 직장인들이 쉬는 날이지만 ‘일꾼’을 모으자면 작업날짜로 휴일을 골라야 하니 해마다 어쩔 수가 없다. 그나마 올해는 일정을 당겨 ‘어린이날’을 챙겨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으니. 어쨌거나 그 덕분인지 정말 많은 일꾼이 모였다. 연인원 60명이나 되는, <벼농사두레> 공동작업 역사상 가장 많은 숫자다. 올해는 특히 지역사회와 함께 하려는 고산고등학교 학생과 교사들의 참여로 더욱 뜻깊은 작업이 되었다.
“절대 무리하지 마시고, 좀 힘들다 싶으면 얼른 다른 분과 교대하세요!”
사람이 넘쳐나니 여유도 넘쳐난다. 누군가 해찰을 해도, 몇몇이 모정 마룻바닥에서 낮잠을 청해도 그러려니. 모판을 이어 나르는 공정에서 흐름이 막혀도 느긋하다. 짧은 노동에 넉넉한 휴식, 한껏 늑장을 부려도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구슬땀 흘린 뒤 먹는 점심은 꿀맛. 국수가락을 미어 터지도록 말아 넣고도 모자라 썩썩 밥을 비빈다. 여유가 넘치니 ‘뉴페이스’ 소개시간도 진행한다. 그러고도 4시가 안 돼 작업이 모두 끝났다. 이 또한 역대급이다. 뒤풀이가 더없이 흥에 겨웠던 건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요즘 들어 ‘두레’란 무엇인지 자꾸만 되짚게 된다. ‘깜냥껏 힘을 모아 더불어 사는 세계’ 아닐까. 안 그래도 살아내기 팍팍한 시대다. 지금, 여기에서라도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았으면 싶다. 짐짓 ‘나’를 내세우지 않고, 한사코 야박하게 따지지 않고, 유장한 흐름에 함께 몸을 맡기면서. 월간 <완두콩> 2024년 5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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