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22. 17:21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어제부터 논에 거름을 주고 있다.
모내기 전에 주는 밑거름용 유박(油粕)이다.
제품에 굳이 생소한 한자식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말로는 '깻묵'이다.
참깨, 들깨, 콩, 땅콩...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
아무튼 그 깻묵을 가공해서 만든 천연비료를 흔히 유박이라 부른다.
물론 손바닥만한 텃밭을 가꾸는 사람이야 일삼아 만들어 써도 되겠지만
마지기(한 마지기는 보통 200평)를 세는 농사라면 어림 없는 소리다.
당연히 비료공장에서 만든다.
얼마전까지는 제품명이 <*** 유박>이었는데, 이제는 그마저 <*** 엑스텐골드>로 바뀌었다.
엑스텐이 유박이란 뜻은 아닌 듯 한데 당췌 뭔 말인지...
아무튼 이름 깨나 알려진 국내업체에서 만든 제품인데 그 설명을 보자면 이렇다.
"천연 최고급 식물성 유박만을 사용한 친환경 입상 혼합유박비료!! 농진청 친환경유기농자재 목록고시 제품"
얼추 '여러 가지 깻묵을 섞어서 만든 천연비료' 쯤으로 들린다.
실제로 반투명의 작은 알갱이로 된 화학비료와는 모양부터가 다른다
깻묵을 으깬 뒤 '국수틀'로 뽑아(아마 이걸 '펠릿'이라 하지?) 무슨 가축사료처럼 생겼다.
냄새는 좀 거슬리는 편이고, 한 포대가 20Kg으로 약간 버거운 무게다.
이걸 한 마지기에 6포씩 뿌린다.
비료를 준다 함은 삼태기 같은 그릇에 내용물을 덜어 한 움큼씩 휘익 흩뿌리는 걸 말한다.
실제로도 그랬다.
빈 플라스틱 페인트 통에 유박을 쏟아부으면 반 포대, 10Kg이 들어간다.
그걸 왼쪽 옆구리에 끼고 걸어가면서, 오른손으로는 긁어서 흩뿌리는 동작을 반복한다.
어제 아침 나절엔 운영 씨하고 둘이서 네 마지기를 소화했다.
비료는 트럭에 실어 날라 한 곳에 쌓아두었다.
그래서 한 포대를 다 뿌리면, 새 포대를 뿌리다 만 곳까지 지어 날라야 한다.
차량이나 손수레 같은 것으로 드문드문 미리 갖다 둘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논바닥이 너무 질다.
하는 수 없이, 한 포대 씩 어깨에 들춰 메고 날라야 했다. 그 거리가 길게는 70미터다.
어제는 둘이 하느라 그랬는지 그닥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영 딴판이다.
일을 시작한 지 반 시간도 안돼 땀이 줄줄 흐른다.
처음엔 두 포대 씩 들어 날랐는데, 몇 번 하고 나니 기운 쑥 빠져서 한 포대씩으로 후퇴.
슬슬 꾀가 나기 시작한다.
그래, 예전엔 이걸 지게에 실어날랐지. 맞아, 안성맞춤이야.
그런데 지게를 어디서 구하지? 일단 집으로 가서 수를 내보자.
한 마지기나 뿌렸을까, 일단 작업을 중단하고 자전거에 오른다.
집에 도착해 창고를 뒤져보니 공사판에서 쓰는 합성고무 질통이 눈에 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일단 이걸로...
하지만 생각처럼 자세가 나오지 않는다.
처음엔 세 포(60Kg)를 올렸는데 일어서기조차 버겁다.
용을 쓰니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하는 수 없지, 두 포씩...
한 포는 질통 안으로 집어넣고, 그 위에 한 포를 얹는다.
이 마저 쉽지가 않지만 그래도 일어나서 뒤뚱뒤뚱 걸을 수는 있다.
그 옛날 독립투사들이 눈쌓인 만주벌판을 이렇게 걸었을까?
다섯 마지기(1천평) 쭘 되는 논에 30포대 남짓 뿌리고 나니 11시가 조금 넘었다.
7시 반에 시작했으니 네 시간이 채 안 걸린 셈이다.
사지에 힘이 하나도 남지 않은 듯 하고, 목이 타서 자꾸만 헛기침이 나온다.
'곤죽이 된다'는 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렷다.
농수로 뚝방에 퍼질러 앉아 바라보니
처절한 전투의 전상자 마냥 빈 비료포대가 논바닥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건 '사서 하는 생고생'에 가깝다.
요즘 세상에 이리 무작시럽게 거름을 내는 경우가 어딨나.
오늘 아침, 딸기밭에서 마주친 앞집 어르신 말씀도 그거다.
"일찍부터 어디 가셔?"
"시암골 논에 유박비료 좀 주려고요."
"시암골, 거 지억먹기 힘들텐데... 어찌 그런 논을 구했댜? 그리고 맨손으로 비료 주실라고?"
"예..."
"멫 마지긴디요?"
"다해서 스물 다섯 마지기요"
"그 많은 논에? 그거 트렉터로 해야 할 걸... 그냥은 힘들텐데..."
정말 걱정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다음에는 트렉터로 하더라도 이번엔 손에 좀 익혀 볼려고요."
그래도 걱정스런 표정은 풀리지 않는다.
그 스물 다섯 마지기 중 어제오늘 비료주기를 끝낸 게 여덟 마지기 남짓.
이제사 겨우 1/3을 마친 셈이다.
오늘 일로 보면 좀 끔찍하기는 하다. 계속 할 수 있을까?
'비료살포기'를 검색해보니 이런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저걸 쓰면 채 하루도 안 걸리겠지...
그래도 논농사를 꼭 몸에 익혀야 하는 것일까... 참 고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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