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간승리'에 대한 보고서

2012. 5. 24. 17:22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결국, 마침내, 드디어, 끝내... 끝났다. 거름주기가.

지난 21일부터 나흘에 걸친 '대장정'이 오늘 오후 1시, 막을 내린 것이다. 

두 팔 안쪽을 물들인 시퍼런 멍자국과 후줄근한 입성을 훈장으로 남긴 채.

가릅재에서 어우마을 모정, 샘골을 거쳐 백도리에 이르는 총연장 10리길에 널린

연면적 16,841㎡= 5,103평=25.5마지기 논바닥을 퀴퀴한 냄새 풍기는 유박거름으로 덮어렸다는 거 아닌가.

장하고도 장한 쾌거라 아니할 수 없지 않은가 이 말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고통이 자심했던가.

오뉴월 뙤약볕에 비오듯 쏟아낸 비지땀은 그 얼마였던가.

그 와중에 중도작파의 달콤한 유혹은 또 얼마나 끈질겼던가.

그 모오든 시련을 이겨내고, 마침내 '인간승리'의 찬란한 이적을 일궈내지 않았는가 이말이다!

 

지게 하나가 없어서 맨 손으로, 어깨춤에 올려서, 자세도 안나오는 질통에 담아서...

100미터 거리도 마다 않고 유박거름 포대를 지어날랐다.

늪지대를 방불케 하는 질퍽한 논바닥에 장홧발은 푹푹 빠지고,

마른 땅이라 해도 무릎밑까지 자라난 독새풀이 전진을 가로막고,

난달에 쌓아둔 뒤끝이라 노오랗게 핀 곰팡이 먼지는 눈으로, 콧속으로, 목구멍으로 사정없이 스며들고,

한 움큼 쥐어 힘차게 흩뿌리는 끝없는 단순반복 동작에

이두박근 삼두박근은 뻐근하고, 뼈마디는 시큰하고, 손끝은 아리고

반복동작 와중에 페이트 통에 수 없이 쓸린 팔뚝엔 시퍼렇게 쑥물이 들었다.

그래도 해냈다. 결국은.

유박거름 내기의 마지막 흔적은 포대에 인쇄된 각종 안내문안.

 

 

*     *      *

 

하지만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못할 거 같다.  

이제는 트렉터를 사서, 거 뭣이냐 '비료살포기'를 달아 기계의 힘으로 씽씽 흩뿌려야 할까보다. 

지금 쓰고 있는 책 원고는 '노동과 생태' 챕터를 지나고 있다. 

그 내용 중에는 '석유문명의 종말'이 적잖은 비중을 차지한다.

온실가스, 지구온난화, 기후변화 그리고 오일피크...

한 마디로 석유 좀 작작 쓰고, 대안에너지를 찾아 쓰자는 주장을 담게 되는데,

지금 트렉터를 간절히 소망하는 이 난감한 상황은 또 뭔가.

어제 저녁에 잠깐 들른 운영 씨는 중고 트렉터 견적을 꿰고 있었다.

00마력 본체에, 로터리와 쟁기 달고, 로더는 좀 더 생각해보고,

비료살포기는 빌려서 써도 되지만 여럿이 공동구매하는 게 좋을 것 같고...

그렇게 하면 도합 0백만원 쯤 된다는데, 갈수록 구미가 당긴다. 이걸 어쩐다?

 

문득, 25마지기 농사를 놉(일꾼) 한 명 얻지 않고 단 둘이서,

맨 몸으로 짓는 경우가 전통농사에서도 있었던지 궁금해진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러지는 못했지 싶다.

그렇다면 지난 나흘, 우리는 무모한 도전을 했던 거다.

그나마 하루에 한 나절씩만 했으니 망정이지 온종일 계속했다면

아마 지금쯤 몸져 누워있을 게 틀림없다.

지금도 두 팔은 뻐근하지만 아무튼 또 하나는 끝내지 않았나.

첫 모내기까지 한 일주일 남짓은 이번처럼 힘 쓸 일은 없어 보인다.

 

*       *        *

 

첫 모내기 날짜가 잡혔다. 6월1일.

전부는 아니고 샘골 가운데 배미, 네 마지기만이다.

옆 논에서 먼저 모를 내면 이앙기가 들어갈 길이 막혀 버리기 때문에 일찍 서두른 것이다.

일반 모판용 이앙기하고 겉모습은 비슷한데 심는 원리가 다르다니 좀 궁금해진다.

 

모내기도 얼마 남지 않았고, 이제는 냉해를 입을 가능성이 거의 없어져서

어제 저녁에는 못자리를 덮은 부직포를 걷어냈다.

비밀의 백색장막 아래서 성장을 계속하여

이제는 모에서 벼포기로 거듭나 처음으로 자태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마치 푸른 융단을 깔아놓은 듯, 잘 가꾼 잔디구장이나 되는 듯

못자리는 그렇게 변신해 있었다.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마을 이장님도, 동네 어르신들도 칭찬이 자자하다고.

못자리 만큼은 근동에서 최고라는 얘기다. 밥 한끼 사야 한다는 '압력'까지.

날마다 들러서 물고랑 살피고, 물꼬 내고 틀어막고 착실히 관리해온 보람이 있었나 보다.

초짜가 보기에도 움푹진푹, 둘쭉날쭉인 다른 못자리와는 달리 우리 것은 높이가 쪽 고르다.

운영 씨, 김 장로 더불어 못자리 품평을 하고 있자니

마침 자전거를 타고 지나던 동네 어르신도 한 마디 거든다. 

"아무튼 이 동네에서 젤 잘 되얐어!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