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20. 21:58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오랜만에, 마음먹고 남새밭(텃밭) 푸성귀들을 갈무리했다.
남새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심지어 쇠어가는데
그걸 거둬들일 틈도, 마음의 여유도 생기지 않았댔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어젯밤 늦게 광주에서 올라온 '일꾼'이 생긴 것.
일꾼이래 봤자 부실하기 이를데 없고, 썩 믿음이 가지 않는,
이름 하여 아내.
사실 이 사람을 가리키는 호칭이 참 거시기하다.
이 동네에서는 '애기엄마'로, 허물 없는 사람들한테는 '마누라'로 지칭한다.
뭐, 어르신들 앞에서는 '애엄마', '집사람'을 섞어 쓰기도 하고.
당사자한테는 뭐라 부르냐고? 그때 그때 다르다. 아무튼...
전주역까지 마중갔다가 돌아오는 차안에서 운을 뗐다.
텃밭에 채소들이 지금 난리가 아니다. 하루빨리 솎아줘야 겠다. 그러니 내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들려오는 강력한 어깃장.
"아이구~ 허리가 너무 안좋아서 못해! 본인이 알아서 하슈"
조금 뜻밖이라 잠시 당황, 난감...
* * *
사실, 텃밭을 가꿔보자고 먼저 설레발을 친 건 다름아닌 아내였다.
아마도 도회지 사람들 하는 주말텃밭을 생각했을 거다.
게다가 멀리 가지 않아도, 집에서 몇 발짝 나서면 되니
뭐 그리 어렵겠느냐 싶었겠지.
실제로도 텃밭이라면 '애들 장난' 아닌가.
그걸 갖고 '밭농사'를 들먹이는 건 남사스런 일이고...
나 또한 처음엔 적어도 5백평 정도는 돼야 명함 좀 내밀 수 있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땅 한 뙈기 없는 처지로 죽자사자 달려들어도 될까말까 한 마당에,
마치 남일인 양, "어디 그 정도 노는 땅 없는지..." 알아보니
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어떤 작물(그래, 그 정도면 작물이다)을 해보겠다는 구상도 서 있지 않았던 것.
그러던 중 귀촌인들 텃밭 얘기가 나오고, 운영 씨가 김 장로 땅을 소개하면서
'대안부재' 속에 그럭저럭 끼어든 거였다.
아내도 그 계획에 꽤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2백평을 여덟집이 20평씩 나누고, 나머지 40평은 공동경작지로 하는.
하지만 텃밭농사에 임하는 아내의 어설픈 태도는 초반부터 들통나고 말았다.
바람이 좀 불던 날 아욱, 상추, 열무, 쑥갓 따위 씨앗을 뿌렸는데,
한참 호미질을 하던 아내의 신발이 그만 못쓰게 되고 말았다.
밭일을 한다면서 단화 차림으로 나선 것부터가 황당한 일인데...
신발 옆구리가 호미에 걸려 찢겨나가는 바로 그 순간!
냅다 호미를 내던지고는 그 길로 집으로 되돌아가는 꼴이라니...
"이 짓 해서 얼마나 먹겠다고 비싼 신발을 못쓰게 만들어..."
지금 누구를 탓할 처지가 아님에도 버럭 화를 내고는 이내 사라진 것이다.
그 이후로 풀을 매는 건 그만두고, 텃밭엔 코빼기도 안 비친 게 그 여자다.
그러더니 열무가 제법 자랐기에 비빔밥이라도 해먹을 요량으로 넌지시 얘기를 했더니
왠일로 그걸 솎아다가 물김치를 담근 게 텃밭 나들이의 전부다.
* * *
이런 사정을 떠올리니 허리 핑계를 대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싶었다.
"뭐, 그러면 동네 사람들한테 솎아다 먹으라고 하는 수밖에..."
짐짓 소유욕을 자극했더니 역시 강렬한 반응.
"그건 안되지. 힘들게 가꿔놓고는 왜 남들한테 인심이야..."
"그렇게 아까우면 당신이 한든가"
"아무튼 난 못해!"
얘기는 대충 그렇게 마무리됐다.
그런데 오늘 아침,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7시 반쯤 됐을까.
활기찬 목소리로 흔들어 깨우며 빨리 텃밭으로 가잔다.
"허리가 아파서 못 하겠다며?" 이랬다가는 산통 다 깨지기 십상.
그냥 못이기는 척 따라나서는 게 상책이다.
남새들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벌써 솎아 줬어야 했는데, 때를 놓치다보니 씨가 듬뿍 뿌려진 곳은 잔챙이만 빼곡하다.
솎는다는 것은 원래 튼실한 놈이 더 잘 자라도록 잔챙이를 뽑아주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의미의 솎음질은 진즉 했을 때 얘기다. 그 때 솎아낸 놈들은 그냥 버린다.
하지만 거름기를 먹고 제법 자란 터라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 상태다.
이런 경우는 반대로 가장 굵직한 놈들부터 솎아 '먹는다'.
적치마 상추는 수북이 자랐는데, 마치 포장랩처럼 얇팍하고 흐물흐물.
솎아내려고 한 움큼 뽑아내니, 실낱같은 잔챙이 투성이다.
청치마 상추는 적치마보다는 낫지만 역시 형편이 말이 아니다.
바로 옆 쑥갓도 사정은 엇비슷.
제법 튼실한 놈 옆으로 역시 빼빼 마른 줄기들이 수북하다.
쑥갓은 부실한 것들을 솎아 내버리고 튼실한 놈으로 갈무리한다.
포기 째 뽑는 게 아니라 무듬지를 끊어내 거둔다.
그러면 잎마디에서 곁가지가 자라나 나중에 또 거둘 수 있다.
열무를 자세히 보니 어느새 고동(꽃대)이 섰다. 이미 쇠었다는 뜻이다.
잎을 만져보니 아니나 다를까 무척 단단하다.
일단 고동이 선 놈들은 모조리 뽑아내고, 게 중 작은 놈으로 조금 남겨 두었다.
그 바로 옆이 엇갈이배추. 크기가 들쭐날쭉하다.
역시 큰 놈부터 솎아내는데 '땅꼬마' 같은 녀석들도 꽤 된다.
얼추 솎음질을 끝내고 나니 큰 비닐봉지로 네 개나 된다.
대충 이집, 저집 나눠 주면 남아서 골치 썩일 일은 없겠지 싶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걸 다듬고, 씻는 임무가 내게 떨어졌다.
자기는 아이들 밀린 공부 좀 봐줘야 겠다며. 대신 김치는 자기가 담겠다고.
"아이들 공부에 왜 당신이 끼어드는데..."로 시작하면 일이 커지고, 요란해진다.
그냥 시키는 거 묵묵히 하는 게 여러모로 남는 장사다.
이미 쇨대로 쇠어 뻣뻣하기 이를 데 없는 열무부터 다듬고, 씻어서 소금에 절여놓고.
다음엔 배추도 같은 방법으로.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시간도 많이 잡아먹고, 자꾸 짜증이 난다.
특히나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배추 꽁지를 맞춰 씻고, 뿌리는 잘라내고...
속이 터진다.
그나마 정말 다행인 것은 거둬온 것 중 절반은 이웃에 나눠주고,
상추는 그대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는 사실.
아무튼 어렵게 어렵게 다듬고, 씻고, 절이는 공정은 모두 끝났다.
그 놈들을 다시 한 번 씻고, 양념을 만들고, 버무리고, 그릇에 담는 것은
그나마 내 소관이 아니다. 그게 어딘가. 행복감이 물결처럼 밀려든다~^^.
밥상에 오를 엇갈이 배추김치, 열무김치는 맛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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