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잔에 빠뜨린 단오잔치

2012. 6. 3. 13:04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시골에 산다

다시 동네 잔치판이 벌어졌다. 제8회 풍년기원 단오맞이 한마당.

'친환경농법, 농촌사랑 그리고 생태체험'이란 부제가 붙었다.

다들 알다시피 단오는 음력 5월5일, 고유명절의 하나다.

마한시대에는 파종이 끝난 뒤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음주가무로 밤낮 쉬지 않고 놀았다는

기록이 있어 풍년기원제의 유풍으로 본단다.

하지만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마을에선 단오절을 지낸 기억이 전혀 없다.

해서 '창포를 삶은 물로 머리를 감는' 교과서 속 풍속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아무튼 이 곳에서는 올해로 여덟번째, 삼우초등학교 뜰, 그리고 어우리 들판에서 단오잔치를 벌이고 있다.

그 자세한 연원을 직접 들을 순 없었고, 학교 송수갑 교감 선생이 쓴 글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지역사회와 함께할 때 농촌교육의 희망을 찾을 수 있고, 작은 학교가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 작은 행사를 준비했다.

고장을 지키며 오리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땅기운쌀작목반'과 삼우초가 공동으로 개최한 '2005 풍년기원 단오맞이 한마당'이 그것이다.

우리가 꿈꾼 것은 고장의 유기농공동체와 농촌의 작은 학교가 하나 되는 신바람 나는 '지역사회 학교'이다.

체험학습과 관계된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학교 주관으로 운영하고, 소달구지 타기를 비롯한 농촌 놀이체험은 작목반과 학부모회가 맡기로 했다.

행사장 준비는 작목반에서 맡고,야외화장실과 음료수 준비, 내빈안내는 고산면사무소로 역할이 분담되었다.

다양한 체험코너를 안내하고 지도하는 일은 삼우초 교사들과 계절학교 명예교사, 학운위원 등에게 주어졌다.

행사장의 대형 앰프 이동과 설치는 농민회가 도움을 주었다.

특히 농심 가득한 학부모회의 헌신성이 큰 역할을 했다.

300명이 넘는 점심식사를 마련하기 위해 직접 장작불을 때고,

매운 연기 때문에 연신 눈물을 닦아 내며 국수를 삶는 학부모들의 모습은 우리네 옛 농촌의 순수함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송수갑, 농촌학교의 한계를 희망으로 바꾸다 <작은학교 행복한 아이들>

 

행사 안내전단에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행복한 만남. 유기농으로 작물을 생산하는 땅가운쌀작목반,

그리고 농촌의 아름다운 작은 학교를 만들어가는 삼우초등학교가 함께 여는

지역사회공동체의 축제마당'으로 그 성격을 간추려놓았다.

아무튼 이 행사가 고산면 전체를 아울러 고장을 대표하는 잔치판임은 분명해보인다. 

그런데 올해 단오는 오는 6월24일이다. 3월에 윤달이 끼어 여느해보다 늦은 점을 감안해 6월2일로 일찍 당긴 모양이다.

학교 쪽에서는 그 동안 행사에 대해 특별한 안내를 받지 못했는데, 땅기운쌀작목반에서는 내게 '오더'가 떨어졌다.

행사날 아침 일찍 학교에 나와 함께 천막을 쳐야 한다는 것이다. 마다할 이유가 있나.

8시쯤 학교에 다다르니 이미 천막 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운동장을 빙 둘러 여러가지 체험부스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천막설치는 금새 끝났다. 잔치판 여기저기를 기웃대는 사이 이 학교 어린이 풍물패의 길굿이 시작됐다.

공식 개막식에 해당하는 '마당열기'가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이 학교 5학년인 작은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천막 치러 나올 때까지도 늦잠을 빠져 있었지.

잰 걸음으로 2백미터 쯤 떨어진 집에 들르니 아직도 꿈나라를 헤매고 있다.

흔들어 깨워 아침을 먹인 뒤 함께 자전거에 올라 학교로 돌아왔다.

어귀에 들어서니 여태권 목사의 축사가 들리고 곧이어 개막행사는 마무리됐다.

첫 프로그램은 모내기 체험이다.

아이들과 학부모, 선생들이 뒤섞여 학교 앞 논으로  우~ 몰려간다.

어제 이앙기로 함께 모를 냈던 김 장로네 논이다. 오늘 체험을 위해 한 마지기 반 정도를 빈터로 남겨두었다.

농로를 사이에 두고 두 필지가 마주보고 있는데 한쪽은 삼우초 아이들이,

어른 한쪽은 생협 서울회원들이 각각 모내기 체험을 한단다.

어우리 들판이 삽시간에 알록달록한 사람들 물결로 넘실댄다.

 

 

 

그러니까 이앙기가 보급되기 전인 1970년대 초까지 모내기는 당연히 사람 손으로 이루어졌다.

모내기 철이 되면 동네 젊은 아낙들은 모내기 작업반에 편성되는데 고향마을에서는 그게 3~40명을 헤아렸다.

벼농사를 짓는 집은 최소한  한 명은 의무적으로 참여했던 것 같다. 

농사규모가 서로 달랐으니 '품앗이'보다는 작업자를 일일이 적어둔 뒤 '날삯'을 계산하는 방식이었지 싶다. 

 

헌데 오늘 모내기에서는 얼결에 재현이 아빠와 내가 못줄을 잡게 됐다.

모내기 줄은 흰색 또는 검은색 나일론 줄에 작은 빨간색 술(꽃)을 매달아 심을 자리를 표시한다.

논 양옆으로는 씨줄을 띠어 줄간격을 맞추는데, 보통은 날줄 방향만 모가 나란하게 된다. 

흙탕물로 넘실대는 무논에 발을 담그는 5, 6학년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괴성을 질러댄다. 

뻘 속에 들어서는 느낌이 그리 좋은 건 아니지.

김 장로가 모내기 방법을 기껏 설명했지만 역시나 아이들은 제 멋대로다.

못줄 안 쪽에 심는 녀석,  못줄과는 상관 없이 저만치 꽂아넣는 녀석, 못줄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심는 녀석...

하긴 미리미터 단위까지 간격을 맞출 필요는 없다. 제대로 꽂히기만 하면 된다.

나름 대로 열심히 하다 다리가 꼬이는 바람에 흙탕물에 엉덩방아를 찧는 아이도 보인다.

그 사이 3, 4학년 아이들은 왕우렁이를 논에 집어 넣은 체험을 하고 있다.

모내기 체험은 30분 남짓만에 끝났다.

손을 씻고 있자니 둘째 아이가 양손에 열무국수 그릇을 들고 서 있다. 학부모회에서 샛거리로 준비한 것인 모양이다.

한 그릇은 제 담임선생께, 또 한 그릇은 내게 건네준다.

그다지 출출하진 않지만 녀석의 성의를 생각해 갈대젓가락으로 후루룩 몰아 넣는다.

 

 

 

이제부터 대동놀이가 예정된 세 시까지는 자유시간이다. 저마다 맘에 드는 놀이나 체험을 할 수 있다.

전통-놀이마당으로는 천연비누 만들기, 풍물, 윷놀이, 부채 만들기, 한지제기 만들기, 나무표지판 만들기, 짚풀공예(새끼줄꼬기, 이엉, 달걀꾸러미),

상설-먹거리마당으로는 얼굴그림, 수지침, 창포물에 머리감기, 알뜰시장, 먹거리장터, 딸기세이크, 삶은 감자, 감식초, 떡메치기, 친환경농산물 판매가 준비됐다.

특히, 국수와 감자를 삶는 데 에너지 절감형 철제화덕이 쓰여 뭇사람의 눈길을 붙을었다.

운영 씨도 회원인 대안에너지연구회에서 열효율을 높일 수 있도록 특별 제작한 것이다.

주로 가는 장작이나 삭정이를 땔감으로 쓰는데 1/4밖에 안 되는 양으로도 같은 열효율을 낸다고 한다.

얼마나 열 효율이 높은지  연통이 달궈지지 않는다고 했다. 밖으로 빠져나가는 열이 거의 없다는 말씀.

체험마당을 돌아볼 채비를 하고 있는데 때마침 마주친 영우 아빠가 막걸리 판이 벌어진 곳을 가리킨다. 참새가 어찌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랴.

곧장 학교 숲쪽을 찾았더니 이 동네 주류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 있다. 그것으로 오늘 하루 일정은 결정이 나버렸다.

막걸리 잔이 쉴 새 없이 날아 다닌다.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띌작시면 여기저기 손짓이 이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취흥은 도도해진다.

막걸리판의 구성원은 계속 바뀌는데 나 혼자만 붙박이인 것 같다.

때로는 거친 댓거리가 오가고, 어느 순간 돌아보면 단 둘이만 남았더니 또 보니 자리가 들어차 있다.

 

 

얘기가 끊긴 사이 먼 발치로 학무모마당이 펼쳐져 '물동이 이고 달리기' 같은 경기가 벌어지더니 이윽고 대동놀이로 접어든다.

강강술래를 마지막으로 놀이판이 모두 마무리됐다. 막걸리판도 이제 접을 시간이 된 것이다.

자리에 깔았던 은박매트를 둘둘 말아 비닐봉지에 넣고, 잡다한 물건을 정리한다. 

대안에너지 부스 쪽으로 가보니 삶은 감자가 잘 익어 모락모락 김을 피워올린다.

작은 아이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을 몇 바퀴 돌고 있자니 예의 그 영우 아빠가 이어지는 술판을 알려준다.

알았노라고... 잠깐 집에 들렀다 오마고... 작은 아이와 함께 집으로 향한다.

대략 다섯시쯤 되었을까, 취기가 몰려 들어 잠깐만 눈을 붙이자고 드러누웠는데...

그만 한잠이 되고 말았다. 눈을 뜨니 시침은 8자를 가리키고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