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26. 11:56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시골에 산다
어스름이 내려 앉는 5월 하순의 저녁시간.
저녁을 좀 든든히 먹었는가 포만감이 느껴진다.
아이들을 닦아 세운다.
"얘들아, 자전거 삭책 가자!"
보통 작은 녀석은 옳거니 따라 나서는데
큰 아이는 일단 튕기고 본다. 결국은 따라나서게 되면서도.
따라 나서게 하는 '비법'은 그때 그때 분위기에 따라 다르다.
오늘은... 그래, "오늘은 읍내까지 가서 마트에 들를 거야!"
지가 안 넘어갈 수가 없지.
덮지도, 쌀쌀하지도 않은 선선한 날씨.
얼굴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저녁 바람이 포근하고 부드럽다.
드르륵... 드르륵...
서울에 살 적, 배달우유 사은품으로 받은 지 4~5년 된 큰 아이 자전거가
약간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낸다. 그래도 달리는 데는 아무 문제 없다.
작은 아이 건 원래 네발이었는데, 보조바퀴를 떼어낸 빨간 아동용이다.
새 걸 사달라고 조를 법도 한데, 그런 쪽으론 통 욕심이 없는 아이들이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오른쪽에 강물을 끼고 뚝방길을 달린다.
가끔씩 자전거, 자동차가 지나는 한적한 포장도로다.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다.
이른 아침엔 걷거나 뛰박질 하는 '운동권'이 제법 보인다.
지난 겨울, 애들 방학 때는 매일 아침,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탔다.
하지만 애들이 개학하고 부턴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일.
어느날부턴가 시나브로 관두게 됐다.
그 뒤 큰 아이에게는 중학교에 가면 자전거로 통학하라고 권했다.
본인도 그거 괜찮겠다고 했는데 결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전거로 통학하는 아이가 없다고 했다.
3킬로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인데, 요즘 아이들에겐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인 모양이다.
대신 아이들은 보통 시내버스를 타거나, 자가용 신세를 지는 것 같다.
큰 아이도 입학하고 보름 남짓은 자가용으로 실어날랐다.
하지만 그게 좀 남사스럽기도 하고, 갈수록 틈을 내기도 어려워져서
시내버스로 통학하도록 길을 들였다.
몇 달 째 이어지고 있는 전주시내버스 파업의 여파로
평소엔 10분마다 한 대 씩 지나간다는 버스가 시간제로 운영되니 불편하긴 하다.
문제는 이따금 평일에 내려오는 저희 어미다.
아직도 도회지 삶의 땟국물이 빠지지 않은 이 여자는
바쁜 아침시간, 아이에게 이것저것 참견하다가 매번 버스를 놓치게 만든다.
뭐, 그래봤자 틀어질 일은 없다. 자가용으로 실어다주면 되니까.
이제는 아예, 제 어미가 내려온 날 아침은 '자가용 등교의 날'로 여긴다.
나로 말하자면 서울에 살 때도 출퇴근은 반드시 전철이나 시내버스였다.
현실적으로 그게 외려 더 빠르고, 편리하다. 교통지체와 주차문제가 오죽 심한가.
운전대 잡고 하릴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아깝고,
하루가 멀다 하고 술판을 벌이다보니 이건 차라리 골칫거리다.
해서 운전석에 앉을 일은 거의 없었고, 외진 지방출장이나 주말 나들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화석연료 남용에 따른 기후변화, 에너지위기의 심각성을 깨달은 뒤로는
자가용을 무슨 독약 보듯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시골에서 살다보니 사정이 영 딴판이다.
도대체 자가용이 없으면 운신을 어려울 정도다.
'거미줄같은 대중교통망'은 그만두고 띄엄띄엄 다니는 시내버스가 전부다.
그나마 노선이라는 것도 이 동네로 치면 세 가지던가.
사정이 이러하니 사실 버스 탈 엄두를 내기가 어렵다.
내려온 지 한 해가 넘었지만 그 새 버스 탄 기억은 딱 한 번.
그것도 새로 산 자가용을 인수하러 전주시내로 갔을 때다.
그리고 지난 한 해, 평일엔 적어도 20킬로미터를 자가용으로 달려야 했다.
아이들 학교가 5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서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
여기가 그 무슨 '슬로우 시티'도 아니고,
농업 또한 이미 산업이 되어버린 마당이니
지금 '목가풍'을 들먹일 계제가 아니란 말이다.
해서 이 한적한 시골 마을도 가끔씩 주차난을 겪는다는 거 아닌가.
읍내에서 일정 규모 행사라도 열리는 날이면
면사무소, 농협 근처 주차장이 차들로 넘쳐나 빈 자리를 찾아 헤맬 정도다.
왠만한 거리, 그러니까 대략 5백미터가 넘으면 자가용을 타는 데 스스럼이 없어 보인다.
자가용이 절실히 필요한 곳은 정작 시골인 셈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좀 찔리는 구석은 있다.
그래서 자동차 열쇠를 꽂기 전에 늘 따져보는 버릇이 생겼다.
꼭 차를 몰고 가야 할 곳인가를.
그리고 나름대로 원칙을 세웠다.
읍내보다 가까운 거리는 어쩔 수 없는 경우,
예컨대 무건운 짐을 실어야 하든가 하지 않으면 차를 쓰지 않는다는.
그래서다.
동네 근동에 볼일이 있을 때,
3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운영 씨 집에 갈 때,
남새밭을 돌보거나 못자리를 둘러보러 갈 때,
물대기, 물빼기, 거름주기 따위 논일을 하러 갈 때,
이런 때는 반드시 자건거에 오른다.
보통은 한 손에 열두발 쇠스랑(쇠갈퀴)을 비껴들고 타는데,
가끔씩은 저팔계가 말타고 싸우러갈 때 이런 꼴일까 공상에 잠기기도 한다.
아무튼 앞으로는 자전거 이용거리를 더 늘려나갈 생각이다.
좀 있으면 읍내에서 술판을 벌일 일도 생길 터이니
음주운전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할 듯 하다.
* * *
우리집 세 식구 자전거 행렬은 어느덧 강뚝길을 빠져나와
읍내 차도로 들어선다.
자전거도로가 따로 없어 보도블럭이 깔린 인도를 달린다.
그렇게 한 2백미터를 달리면 읍내 농협마트에 닿는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빵이며 우유, 떠먹는 요구르트, 과자 따위를 양컷 바구니에 집어담는다.
맥주 한 상자를 살까 하다가 관두기로 했다.
자전거 짐받이가 그걸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서다.
바닥난 먹거리를 이것저것 챙기다보니 바구니가 묵직하다.
결국 생각보다 결재금액이 많이 나왔다.
그걸 빈 상자 두 개에 나눠 담고 작은 건 큰 아이 자전거에 실었다.
이젠 사위가 어둑어둑 해졌다.
가로수가 우거진 강뚝길을 지나던 큰 아이가
"꼭 귀신이 안올 거 같다"며 난데없이 '현대식 귀신' 이야기를 꺼낸다.
부녀지간에 객쩍은 댓거리가 오가다보니 어느새 집근처다.
이 한적한 도로에 오늘따라 왜 이리 지나는 차량이 많은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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