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라벤'의 경고

2012. 8. 30. 21:21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시골에 산다

태풍 '볼라벤'이 할퀴고 간 자리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그런데 29일 오전만 해도 '태풍피해 생각보다 적었다'는 넋나간 보도가 나오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중부지방보다 남부지방이 피해 컸다'로, 그 다음은 '농작물·수산물 피해 심각'으로 논조는 바뀌어갔다. 실제로 마을 어르신들은 "이런 태풍은 난생 처음"이라 입을 모은다고 한다. 적어도 이 고장에서는 '사라'나 '매미'보다 셌다는 얘기다. 흔히 듣게 되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은 다른 태풍 때와 비교되는 현상을 통해서다.  

 

볼라벤이 이 곳에 들이친 것은 어제, 그러니까 28일 오전 11시께. 보도매체들이 온통 '초특급 태풍'을 예고한 만큼 창문을 단단히 걸어잠그고, 집안에 틀어박혀 인터넷으로 태풍 관련 기사를 검색하고 있자니 처음엔 그만저저만 했다. 그런데 창문 너머로 저만치 보이는 비닐하우스 한 동이 들썩들썩 요동을 친다. 창문을 살짝 열었더니만, 휘잉~ 허공을 가르는 특유의 바람소리가 허공을 울리고, 비닐이 이리저리 기우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다음부터 태풍의 진척상황은 그 비닐하우스가 시시각각 보여줬다. 처음엔  기우뚱거리던 비닐에 조그만 구멍이 생기더니 차츰 넓어졌다. 그 뒤로는 찢겨진 비닐이 너풀거리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물론 비닐은 계속 찢겨져 나갔고, 서 너 시간 뒤에는 한 동 전체가 갈기갈기 찢긴 채, 바람을 타고 부르르 떨어대고 있었다. 

 

태풍 볼라벤의 여파를 실감나게 보여준 문제의 비닐하우스.(사진 왼쪽의 멀쩡한 비닐하우스와 대조를 이루는 오른쪽 구조물)

 

4시 30분이나 됐을까. 바람이 잦아들었다. 나락은 괜찮은지 좌불안석이다. 기어이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 가까운 학교앞 논부터 가보니 걱정했던 상황은 아니다. 바람에 시달린 흔적은 보이지만 밑둥이 꺾여 쓰러지진 않았다. 그 다음은 모정앞 논. 자전거 패달을 밟아 마을회관을 지나는데 뭔가 을씨년스럽다. 바로 옆 당산나무가 '산발'을 하고 있다. 지름 10~15센티나 되는 가지들이 태풍에 작신 부러져 나뒹굴고 있다. 바로 앞 당집 할머니가 대문앞에 내놓은 의자에 앉아 넋이 빠진 표정을 하고 있다. 모정에 도착하니 여기도 말이 아니다. 가죽소파는 엎어져 있고, 선반 위에 올려 놓았던 라디오는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고, 화투를 둘둘 말아 한켠에 치워둔 쑥색 담요는 바람에 날려 논 속에 처박혔고, 화투장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야말로 쑥대밭이다.

 

논을 한 바퀴 들러보려도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 역시 센 바람을 맞은 티는 나지만 쓰러지지는 않는 것만 확인하고 발길을 둘렸다.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바로 옆 비닐하우스 세 동 가운데 하나는 미닫이 문짝이 떨어져 나가 있다. 급히 전화를 걸어 그걸 알렸더니만 목소리에 풀기가 하나도 없다. 

"다른 하우스는 온통 비닐이 찢겨지고 날아가 버렸는데, 문짝만 떨어졌다니 황공하네요. 아무튼 알려줘서 고마워요."

때 마침 바람이 다시 불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른바 '후폭풍'이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운영 씨네 비닐하우스가 떠올라 휴대전화 버튼을 눌렀다.

"찢어지고, 문짝 떨어졌다고요? 말 마세요. 우리는 아예 철골구조물이 아예 뽑혀서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휘어 버렸어요. 계곡 끝쪽이라 바람이 더 세찼던 거 같아요. 후폭풍이 몰려왔으니 내일 아침에 다시 봐야죠."

바람소리를 양념 삼아 밤새 비가 내렸다. 어둠 속에서, 설령 밝은 낮이라 해도 태풍이 난리굿을 하고 있는 동안엔 속수무책이다. 날이 밝고 나서야 지구의 한켠은 처참한 몰골을 드러냈다.

 

머리를 감느라 시내버스를 놓쳐버린 큰 아이가 울상이길래 승용차 편으로 학교에 데려다 주었다. 도로 양 옆은 상처투성이다. 주욱 이어진 감나무들은 성한 놈이 거의 없다. 가지가 부러진 건 기본이다. 아예 뿌리가 뽑혔거나, 두 갈래 줄기가 쪼개져 넘어진 게 태반이다. 비닐하우스들도 대부분 비닐이 찢겨나갔다. 차를 모는 김에 전체 논을 둘러보기로 했다. 샘골 아래부터 가운데, 위쪽의 재실논까지 움직이며 바라보니 적잖이 쓰러져 있다. 3킬로 남짓 떨어진 백도리에서는 차에서 내려 세 다랭이를 둘러봤다. 역시 적잖이 쓰러졌다. 완전히 눕지는 않았지만 벼이삭이 거의 논바닥에 닿을 듯 하다. 가슴이 싸아 해진다. 가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오며 논배미마다 일일이 차에서 내려 둘러 봤다. 역시 완전히 눕지는 않았지만 논바닥과 거리가 가깝다. 그래도 그 정도면 큰 문제는 없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논을 둘러보는 길목에 있는 운영 씨네 비닐하우스가 눈에 들어왔다. 한마디로 처참하다. 2/3쯤은 철골구조물이 뽑혔다가 한쪽으로 쓸리는 바람에 줄줄이 휘어있다. 비닐도 적잖이 벗겨지고 찢어졌다. 통화를 하니 복구비용이 많이 들면 다시 지어야 할지 회의스럽다고 했다. 그 심경이 읽어진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은 뒤 익산 어머니 댁으로 향했다. 엊저녁 통화에서 그곳 상황도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탓이다. 가는 길에 펼쳐진 모습 또한 살풍경이었다. 천호산을 에두른 도로 양편의 소나무들이 여기저기 뿌리가 뽑혀 도로 한켠에 가로놓여 있다. 평지로 들어서니 줄줄이 이어진 비닐하우스는 온통 골조만 드러낸 모습이다. 거의 예외가 없다. 평야지대이다 보니 바람의 피해가 더 컸을 듯 싶다. 어머니 댁 역시 풍비박산의 난장판이었다. 건조장으로 쓰려고 마당에 지어놓은 비닐집은 골조만 남아 있다.

"아이고, 새벽 다섯시부터 여태 치웠어. 나 참, 평생 처음 꼴이랑게"

아들을 반기는 눈빛과는 달리 입에서는 다른 얘기를 쏟아낸다. 나무사다리를 사랑채 지붕에 걸치고, 바람에 쓸려 떨어진 기와 대여섯장을 다시 얹었다. 비닐집에 있던 들마루를 손 보고, 널부러진 나무판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떨어져나간 비닐집 문짝에 나무를 덧대 단단히 고정시켰다. 온몸으로 강풍을 맞아 돌쩌귀가 떨어져나간 철제 대문을 손보고, 장독대에서 피신시킨 옹기들을 제자리에 옮겨두었다. 앞산에 올라 주변을 둘러 보니, 주변 논을 온통 메우고 있는 비닐하우스들은 하나 같이 뼈대만 앙상하다. 어떤 놈은 철구조물이 마치 엿가락처럼 휘어 있다. 산은 산 대로 나이가 수십년은 된 소나무들이 여기저기 뿌리가 뽑힌 채 쓰러져 있다.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보아도 이런 광경은 처음이다.

 

 

태풍이 왜 생기는 지를 다룬 분석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적도 지방은 흡수하는 태양에너지가 지표에서 방출하는 에너지보다 많아 기온이 높다. 반대로 극지방은 지표에서 방출하는 에너지가 태양에서 흡수하는 양보다 많아 기온이 낮다. 적도 지방에 에너지가 쌓이면 온도는 계속 올라가고, 에너지가 부족한 극지방은 점점 추워진다. 이같은 지구의 에너지 불균형을 해소하는 것이 바로 태풍이다. 태풍이 적도에서 양극지방으로 이동하면서 고온의 수증기를 뿌려준다. 이때 열이 방출되면서 에너지 분배가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지구온난화, 기후변화로 적도지방의 기온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태풍도 자주 생기고, 강력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볼라벤 같은 태풍은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기후변화 상황에서는 하나의 시발점이라는 얘기 아닌가. 볼라벤 정도의 태풍이 자주 나타나고, 그보다 위력이 센 태풍이 생길 수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지구온난화를 재촉하는 산업구조와 에너지체계, 생활습관을 계속 이어가도 되는 것인가. 그 대답은 예, 아니오가  아니다. 이미 선택의 문제를 넘어선 것이다. '어떻게' 바꿀까, 이젠 그것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