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11. 23:25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상황을 보아하니 은종 씨가 작업을 마치고 다른 논으로 옮겨간 것 같은데 문제는 어느 논으로 갔느냐다.
운영 씨가 마침 휴대폰을 집에 두고와 난감하다. 일단 내 휴대폰으로 운영 씨 휴대폰을 연결하니 사리 씨가 받는다.
다행히 우리가 다음 코스로 생각해둔 제실논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래봤자 직전거리로는 2킬로나 될까.
제실논이란 이름도 우리끼리 편의상 주고 받는 것이다. 내 눈으로 직접 보진 못했지만 조금 올라가면 어느 집안 제각이 있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제법 긴 이 골짜기를 '샘골'이라 부른다. 현지 발음으로는 '시암골(샴골)'이다.
골짜기 어딘가에 샘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지 싶다.
이 샘골에 우리가 짓는 논이 세 군데 흩어져 있는데, 제실논은 그 중 맨 위에 자리하고 있고 두 다랭이다.
제법 가파라서 논두렁 높이가 1미터를 웃도는 다락논으로 되어 있다.
그 시절 모내기는 동네잔칫날
운영 씨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한다. "저는 예배드리고 올게요."
하필이면 일요일이라 교회 집사인 운영 씨로서는 좀 부담이 됐을 성 싶다.
은종 씨 또한 같은 교회 집사인데, 사전에 따로 얘기가 된 게 있는지 작업을 계속한다.
여튼 이 곳의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다랭이가 네모반듯 하지는 않았지만 오이처럼 길쭉하게 휜 모양이라 그럭저럭 작업은 할만 했다.
시작한 지 채 한 시간도 안 돼 일은 끝이 났다. 그러고 보면 이앙기 한 대가 족히 사람 3~40명 몫은 하는 것 같다.
때를 맞춰 점심 때다.
"점심은 어디서..." 은종 씨가 묻는다. "읍내 식당으로 가죠. 거기 새로 문을 연 식당이 있던데... 그나저나 예배도 못드리고 어쩐대요?"
"일년에 이 맘 때 딱 한 번이에요" 진한 아쉬움이 묻어나는 표정이다.
다시 트럭 짐칸에 철제 사다리를 받치고 이앙기를 끝어올린다. 밧줄로 단단히 묶은 뒤 3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우리집 마당에 주차한다.
옥외 수도꼭지를 틀어 장화와 옷에 묻은 진흙을 씻어내고 간단히 세수를 한 뒤 우리 승용차에 올라 읍내로 향한다.
얼마전 개업한 '낙미'식당이다. 이 집 아이가 우리집 둘째아이랑 같은 반이다. 요 사이 그 녀석이 우리집에 자주 놀러왔던 터였다.
은종 씨 뜻을 물어 백반에 제육볶음을 주문하고, 내 맘대로 막거리 한 병을 시켰다.
거참, 모 심는 날 단 둘이서 식당밥이나 먹고 있는 꼴이라니.
옛날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모내기 날이 흡사 동네잔치나 다름 없던 그 시절 말이다.
무려 3~40명이 먹을 점심을 준비해야 하니 모를 심는 집 아낙네들은 비상이 걸린다.
아침 참, 점심, 점심 참, 모두 세 차례 먹거리를 준비해야 하니 보통일이 아닌 탓이다.
당연히 미리 장을 봐 두어야 하고, 누린 것이나 비린 것을 갖춰야 뒷말이 안 나온다.
젊은 아낙들이 총출동했으니 그 집 아이들 밥까지 준비하는 건 당연지사.
이래저래 동네잔치가 아니 될 수 없다.
논 근처에 모정이라도 있으면 더 할 나위 없지만, 없더라도 빈 터만 있으면 그만이다.
먹거리를 담은 광주리를 몇 개 씩 이어 나르고, 막걸리는 주전자 대신 아예 말술로 주문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양껏 배를 불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날이기도 했지.
어떤 고장에서는 풍물패가 뜬다고도 하던데 나 한테 그런 기억은 없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 보니 숫저질이 왠지 허전하다. 시원한 막거리 한 주발을 단번에 들이킨다.
밥 한 공기를 더 시켜서 절반씩 나눈다.
흙묻은 차림으로 오래도록 자리를 차지하기도 그렇고...
커피 한 잔씩 마신 뒤 서둘러 자리를 뜬다.
때 마침 운영 씨한테서 전화가 왔다. 예배 마치고 점심까지 끝냈단다.
"우리 지금 모정으로 가고 있으니까 거기로 와요"
운영 씨와 은종 씨가 얘기를 나누는 사이 졸음이 쏟아진다.
둘둘 말아놓은 담요를 베개삼을 요량으로 끌어당겼더니 와르르 화투장이 비져나온다. 에라 모르겠다.
"그만 갑시다. 어? 깊은 잠이 들었나?" 반 시간도 채 안 된 것 같은데 부시시 일어날 수밖에.
이번엔 월남마을 또는 삼우초 논이다. 월남은 그 논이 자리한 삼우초등학교 근처에 있었다는 마을 이름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그래서 두 이름으로 섞어 부른다.
그런데 논이 S자 형상이라 작업하기가 지랄같다. 그래도 은종 씨는 곡예운전을 해가며 빈틈을 남기지 않고 모를 심어낸다.
하지만 왼쪽에 있는 이앙장치에 문제가 있는지 이빨이 빠진 듯 어지지 않는 빈 땅이 자주 생긴다.
이런 곳에는 사람 손으로 직접 때워줘야 한다. 물론 그 만큼 덜 먹고 말자는 셈으로 안 해도 그만이다.
그래도 어찌 그럴 수 있나. 좀 귀찮긴 하지만 푹푹 빠지는 무논에 어쩔 수 없이 장홧발을 디밀 수 밖에 없다.
다음은 샘골 아랫논 차례. 가운데 논은 지난 6월1일 이미 모내기를 마친 터다.
샘골 아랫논은 다 해서 여덟 마지기다. 네 마지기 짜리 한 배미는 장방형이고, 나머지 네 마지기는 네 조각으로 나뉘어 있다.
그런데 이 네 조각이 걸작인데, 반원꼴에 세모꼴, 사다리꼴 가지가지다. 나머진 그렇다 치고, 세모꼴은 이앙기 모내기가 정말 고역이다.
은종 씨 성미가 무던해서 그렇지 보통 사람 같으면 "못 해먹겠다"고 중도작파하기 딱이다.
한 마지기도 안 되는 그 세모배미 심는 시간과 네 마지기 장방형 심는 시간이 비슷했다면 짐작할 만 하다.
지난번 모내기 때는 논모양은 별 문제가 없었던 대신 이앙기가 자꾸 까탈을 부려 애를 먹었다.
세상일 거저 먹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오늘따라 햇볕은 왜 이리 따가운지, 가만히 서 있어도 등줄기로 땀이 줄줄 흐른다.
고개를 들어 외율마을 쪽을 보니 녹음 짙은 산등성이에 마치 콩고물을 뿌려놓은 듯 누런 무늬가 뚜렷하다. 밤꽃이다.
샘골 왼쪽에 들어선 마을이 어우리고, 그 맞은편은 율곡리다.
밤율(栗)에 실곡(谷)이니 옛 이름은 밤실이다. 어른들은 지금도 그리 부른다.
밤나무가 많이 자라서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안밤실은 원산마을, 바깥밤실은 외율마을로 개칭됐다.
아무튼 '밤꽃 피는 6월'이라고 했던가.
그 때가 되면 밤꽃 특유의 냄새 때문에 처녀들 가슴이 울렁거린다는 택도 없는 소리는 또 누가 지어냈는지 모르겠다.
논배미를 호수로 착각한(?) 오리새끼들
자유형으로 생겨먹은 네 배미에 모를 다 심고 나니 시계는 어느 새 7시를 지나고 있었다.
이앙기가 들어서니 난데없이 나타난 야생오리 새끼 예닐곱 마리가 쏜살같이 달아난다.
어떤 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물 위를 헤엄치는데 그 속도가 제법이다.
아마도 뭘 모르는 사람이 이 광경을 봤다면 마치 호수를 유영하는 오리떼로 오해할 만 하다.
몇 일 전 논물 대러 수로에 나왔을 때도 마주쳤던 녀석들이 분명하다. 열 마리가 넘었던 것 같고, 어미오리도 함께 였다.
그 때도 새끼들은 재빨리 도망쳤는데 어미는 눈앞에서 다친 시늉인지 아니면 시위인지 물 위를 철벅거리는 몸짓을 했었다.
오리새끼야 어찌되었든 이앙기는 돌아갈 뿐이다. 어두워지기 전에 작업을 끝내야 하니까.
오리들이 헤엄을 친다는 것은 그만큼 물이 많다는 얘기다. 오리들한테는 다행이지만 모내기에는 불행이다.
아침나절 지나는 길에 발견하고는 급히 모내기 순서를 바꿨지만 그래도 물은 별로 빠지지 않았다.
물이 너무 많으니 모포기가 흙속에 잘 꽂히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물 위에 뜬 모포기들이 때 마침 불어온 바람을 타고 논위를 둥둥 떠다닌다.
심란한 광경이 아닐 수 없는게 모가 심어지지 않은 빈 자리는 사람 손으로 일일이 떼워야 하는 탓이다.
가뜩이나 예산도 빗나가 모가 모자란다. 못자리 논에 심을 40판 정도가 남아야 하는데 고작 더댓 판이나 남았을까.
모 하나는 정말 잘 키웠다고 온동네에 소문이 자자하더니 결말은 이리 답답하게 지어지는가.
나중에 다른 집에서 심고 남은 걸 가져오면 된다지만 남는다는 보장이 있어야 말이지.
게다가 해가 넘어가고, 어스름이 내리고, 급기야 어둑어둑해질 때까지도 일은 끝나지 않았다.
모내기가 끝난 시각은 완전히 어두워져 가로등 불빛이 훤한 8시 반쯤.
아침엔 샌드위치, 점심나절엔 딸기 샤벳을 준비했던 사리 씨가 이번엔 김치전을 들고 왔다.
속이 말이 아닐텐데도 은종 씨는 기꺼이 몇 점을 든다.
오리새끼 예닐곱 마리가 보내기 중인 논 위를 헤엄쳐가고 있다.(빨간 동그라미)
그 시절, 모내기 작업반에 편성됐던 우리 어머니도 이렇듯 어두워져서야 집에 들어오곤 했다.
그 시간까지 저녁을 못 먹어 배가 고팠던 우리는 늦게 들어온 엄마가 야속하기만 했다.
그래도 저녁을 지어야 하는 어머니는 작두펌프로 물을 길어 다리에 묻은 흙탕물을 씻어내고, 깨끗이 세수를 했다.
그렇게 쌀을 씻어 앉히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어머니가 꾸벅꾸벅 졸았던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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