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26. 21:40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요즘 잡초와 전쟁을 하고 있다.
내가 지금 씨름하고 있는 그 대상물을 뭐라 불러야 할지 한참 고심했다.
그냥 편하게 얘기하면 벼포기 사이에 자라나는 이런저런 풀들이다.
그냥 쓸모 없고, 먹을 수도 없는, 보통 잡초라고들 부르는 풀이다.
하지만 윤구병 교수는 '세상에 잡초가 어디 있냐'고 일갈한다. 다 쓸모가 있다는 거다.
황대권 선생은 풀이란 풀은 뭐든 다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놈의 풀은 쓸모도 없고, 먹을 수도 없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생때같은 벼한테 해코지를 하는 풀, 해초(害草)다.
이제 전우익 선생이 나설 지 모르겠다.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지만
벌레는 그냥 벌레일 뿐인데, 인간이 제 멋대로 해충이네, 익충이네 갈라놓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풀이면 풀이지 해로운 풀, 이로운 풀 이래 나눠야 하나"고 하실 거 같다.
하지만 세 분이 다 달겨들어도 아닌 건 아닌 거다.
나는 지금 그 놈의 풀하고 쌈박질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
한 보름이나 되었나. 샘골 가운데논에서 사단이 시작됐다.
처음엔 무슨 풍란 자태를 한 풀이 물 속에 출현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자라나고 점점 번져갔다.
저것이 무엇인고? 하는 사이에 벼포기 사이에 꽉 쩔어붙어버렸다.
논바닥 전체는 아니지만 이놈들이 장악한 영토가 절반을 웃돌지 싶다.
생김새도 풍란이 쑥쑥 자라 잎새 끝이 하트 모양으로 마무른다.
징글징글 한 놈, 물달개비. 어디 이쁘다는 생각이 들어야 사진이라도 찍지. 인터넷에서 구한 이미지.
어디 맘에 드는 구석이 있어야 그 이름이라도 찾아볼 생각이 들지, 이건 웬수가 따로 없잖은가.
이 글을 쓰면서 어차피 알아겠다 싶어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그 이름이 '물달개비'란다.
게다가 하나 같이 보라색 꽃이 핀 사진들만 줄줄이 올라 있어 처음엔 긴가민가 했다.
어쨌든 이 물달개비가 논바닥을 온통 덮어버리니 나중에 일이 어찌 될지 겁이 날 정도였다.
이장님이 하신 말씀도 있고 해서 이 놈들을 매버리기로 했다.
지난주 금요일부터 아침, 저녁으로 한 두 시간씩 뽑아내기 시작했다. 물론 맨손이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물이 꽤 잡혀 있어서 쉽지가 않았다.
이 놈을 뜯어내면 한 절반은 손아귀에 잡히고, 나머지 절반은 물 위에 둥둥 뜨는 거다.
그걸 다시 손으로 걸러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 한 두 번 하다가는 그냥 내버려뒀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벼의 영토를 탈환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 이틀 지나고 보면 물위에 둥둥 떴던 놈들이 다시 뿌리를 내리고 살아나는 거 아닌가.
어거야말로 환장할 노릇이다. 그 동안의 수고가 '헛지랄'이 되는 순간이다.
허탈하기도 하고, 천불이 나는데 어찌 해야 할지 '방뻡'이 떠오르지 않는거다.
그래, 그 놈들을 한 줌 뽑아서는 맑은 물에 잘 행구어 집으로 왔다.
마침 앞집 승용차가 나들이 나갔던 내외분을 태우고 들어선다.
"이게 뭔 풀인데 온통 논에 쩔어있대요?"
"그거? OOO(이 고장에서 부르는 이름인듯 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이 잖여!" 아주머니가 끌끌 혀를 찬다.
"그 사람한테 얘기혀봤자 쓸데 없으니께 이쪽으로 와봐!" 아저씨가 차문을 닫으며 나선다.
말인즉슨,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농약을 하라는 거다. 모래에 섞어서 뿌리면 한 방에 끝난다고.
"친환경으로 짓고 있는데..."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내가 이 동네 친환경벼농사 처음 시작한 사람이여! 그런디 꿩잡는 게 매여! 생산원가도 생각혀야지 "
그래도 정 농약을 안 쓰겠다면 기계를 쓰란다. 농업기술센터에서 하루 5천원에 빌려준다고.
"그러고, 우선 이거부터 한 자루 챙겨!" 마당에 쌓아놓은 양파 더미를 가리킨다.
그리고 나서 '길고 긴' 농사자문이 이어졌다.
논을 얻어도 똑 못쓸 논만 골라서 얻었느냐. 특히 어디어디 논은 정말 못쓴다.
벼농사 지어봤자 힘만 패이고 돈 안된다. 내년에 좋은 땅 나오면 잡아서 마늘이나 양파를 해라. 도라지도 괜찮다더라.
앞으로 뭔 일 있으면 나한테 먼저 물어봐라.
말씀 잘 들었노라고, 양파는 잘 먹겠노라고 허리를 굽혔다 펴니 이미 어둠이 몰려와 있다.
그리고 오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는 운영 씨 트럭에 올라 농업기술센터를 향했다.
어쩔까 싶었는데 다행히 한 대가 남아 있다. 정식 이름이 '동력중경제초기'다.
생각보다 크기가 작았고, 한 사람이 어렵지 않게 들 수 있는 무게다. 예취기 크기나 될까, 가솔린 엔진을 달고 있다.
아랫배미에 옮겨놓고 시동을 거니 영락없는 예취기 소리다. 논바닥과 함께 잡초를 긁어내는 회전날이 다섯개 달렸다.
가속을 시키니 뱅글뱅글 돌아가며 잡초를 눕히고 그 위에 진흙을 덮는다.
그런데 하룻 사이에 물달개비는 부쩍 자라서 한결 뻣뻣해졌고, 아예 논바닥을 덮고 있다.
제초기가 힘에 부치는지 지나간 자리가 거칠거칠하다. 손으로 매는 것만큼 말끔하지가 않다.
게다가 모포기의 줄간격이 불규칙한 곳에서는 벼포기까지 꺾어놓는다.
풀좀 매려다 되레 수확량이 줄어드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이번엔 윗배미. 여긴 물달개비는 없는 대신 피가 많이 올라와 있다.
사실, 물달개비보다는 이 놈의 피가 더 큰 문제란다.
같은 방법으로 피를 맸다. 기계날이 안 닿아 남아 있는 피는 엔진을 끄고 손으로 뽑았다.
작업하는 모습을 찍어줄 사람이 없어 쉬는 짬에 찍은 제초기.
피사리라고 한다. 제초기가 없던 시절엔 손작업 밖에 없었다.
어른들은 벼농사는 김매기나 피사리가 가장 힘들다고 했다.
실제로 오뉴월 따가운 뙤약볕 아래서 김매는 풍경은 '고단함'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턴가 논농사에서 김매기나 피사리는 보기 힘든 모습이 됐다.
아마도 제초제 덕이 클 것이다.
우렁이농법은 지금처럼 실패할 수 있지만 제초제는 안 그런 모양이다.
"손으로 김을 매겠다"고 말하면 이곳 어른들은 절래절래 고개부터 흔든다. "안 되야! 농약 혀!"
하지만 농사를 포기했으면 했지 "농약은 안 되야!"다.
10시쯤 시작된 작업은 점심을 지나 오후 4시쯤 끝났다. 모두 네 마지기(800평)를 맸다.
기계에 긁힌 다리에선 피가 흐르고, 입성은 온통 작업 중 튀긴 흙탕물 범벅이다.
"안 되야! 농약 혀!"가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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