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2. 16:26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그제, 참으로 달디 단 비가 내렸다. 그것도 온종일 주룩주룩.
그 동안의 가뭄은 이 비로 해갈된 것 같다. 참으로 고마운 비'님', 그래서 옛 사람들은 비가 '오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심정을 고스란히 이해할 것 같다. 저 빗줄기를 흠뻑 뒤집어쓰고 싶은 맘 굴뚝 같았다.
그런데 오후까지도 되어서도 빗줄기가 세차니 좀 걱정이 된다.
혹시 너무 내려서 물바다 되는 건 아닌지... 그럼 물꼬를 확 터놔야 하지 않을까.
밖으로 나갔다. 자전거가 비를 흠뻑 맞아 안장까지 젖어 있다. 걸레로 물기를 닦아 내고 올라탄다. 축축하다.
그런데 좀 가늘어지긴 했지만 그 때까지 내리고 있는 비를 맞고 나니 생각이 복잡해진다. 우비? 우산? 비를 맞고?
비줄기도 잦아들었는데 굳이 가야될까? 설마 물난리가 났을라구... 에잇! 될대로 되라지...
저녁엔 어차피 대학동기 녀석 모친상 문상하러 남원엘 다녀와야 하니까... 핑계가 또 하나 떠오른다.
결국, 자전거가 비 맞지 않도록 주차장 안쪽에 들여놓는 일만 한 셈이 됐다.
그토록 갈망해오던 비였는데 '비맞이 행사'라도 했어야 하는 거 아닌지 뒷북을 치고 있다.
아무튼, 어제 아침은 맑게 밝았다. 비가 내렸다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집앞 포장도로는 물기 하나 없어 보인다.
어제 하루를 쉰 '물관리 순례길'에 나선다.
이 순례길은 학교앞 논에서 시작해 모정을 거쳐 샘골 아래-위, 재실을 지나 백도리까지 이어진다.
물을 그득 채워도 모래흙인 탓에 한나절이면 빠져 버리는 학교앞 논.
30미터 남짓 떨어진 작은 관정에서 호스로 물을 끌어오는데, 웬만하면 마냥 전기펌프를 켜둔다.
그런데 갈 때마다 꺼져 있기 일쑤다. 모터가 너무 낡아 소리가 요란하니 곁에서 일하던 분들이 우정 꺼버리는 모양이다.
그래도 어찌하랴, 물이 말라 있으면 전원을 넣는 수밖에. 숨바꼭지이라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어제는 비온 뒤 끝인지, 모터가 꺼져 있는데도 논물은 그럭저럭 들어차 있다.
모터 전원을 넣을까 하다가 그냥 돌아섰다.
모정앞 논에 다다랐다. 모를 때우거나 풀을 맬 작정으로 고무장화를 신고 왔다.
그런데 바로 옆 논에서 이장님이 모를 때우고 있다.
"아니, 지난번에 사모님이 다 때우셨잖아요?"
"어! 근데 가물어서 그랬는지 다 녹아 없어졌더라고. 그나저나 쩌어그 풀, 오늘같은 날 매야 짤 뽑혀. 시간 지나면 잘 안 뽑혀"
"그래요오?"
일단 논 왼쪽 비어 있는 논바닥에 모를 심고, 듬성듬성 비어 있는 곳을 때워나간다.
아뿔싸! 다리를 너무 구부렸나, 한쪽 고무장화 속으로 그만 물이 들어가고 말았다. 이런 땐 벗어야지 별 수가 없다.
맨발로 들어서니 껄쩍찌근 한 게 역시 느낌이 다르다. 그렇게 몇 십분을 때우고 풀을 뽑았을까.
발바닥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진다. 아마도 자갈 같은 것에 긁혔을 것이다.
에잇! 오늘 작업은 여기까지.
물장화 신은 장면을 어떻게 찍지? 이건 인터넷을 뒤져서 찾은 사진이고, 색깔은 주황색.
그리고 오늘, '출정의 아침'이 밝았다.
긴바지에 양말까지 신은 두 다리를 주황색 물장화 속으로 집어넣는다.
물장화! 진작부터 생각만 해왔는데, 이제는 안되겠다 싶어 어제저녁 읍내 신발가게에서 사온 놈이다.
부드러운 고무재질에 무릎위까지 올라와 무논에서 일하기가 안성맞춤이다.
그런데 그게 좀 '스타일을 구기는' 모양새라 별로 내키지가 않았었다.
하지만 지난번 동력제초기 작업을 하다나서 너덜거리는 발바닥을 보면서 생각을 바꿨다.
두 가지 모형이 있었는데, 좀 보기는 그래도 튼튼한 걸 골랐다.
이윽고 모정논이다. 이 곳만은 늘 물이 차 있었는데 오늘은 웬일로 물이 쫙 빠져 있다.
물이 들어노는 또랑 쪽으로 가보니 역시 물길이 많이 줄었다. 어쨌거나...
물장화 차림으로 논에 들어섰다. 어라? 맨발일 때하고는 느낌이 너무 다르다.
꽃신을 처음 신어 본 원숭이들이 아마 이런 느낌이었겠지 싶다. 왜 진작 이걸 신지 않았던가.
일단 듬성듬성 벼포기가 빠진 곳을 때우고 풀을 매기 시작했다.
이 논은 다른 풀은 별로 없는 대신 피가 많이 올라와 있다. 특히 물 들어오는 쪽 100평 남짓은 거의 '피바다'를 이루고 있다.
한 번에 다섯 고랑씩 잡고 풀을 뽑아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하니 싯구가 하나 떠오른다.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다.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를 거쳐 만나는 구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얼마전 풀이니, 잡초니, 해초니 해싸며 호들갑을 떨던 일이 생각나서다.
그래, 지심을 매는 것이다. '표준말'은 '김매다'고, '지심매다'는 강원, 충북지방 말이라고 했다.
전라북도에서 자란 나도 어릴 때 '지심'이라고 들었는데... 게다가 이상화는 대구 출신 아니던가.
여기서 무슨 어원 따지고 자빠질 일은 없지만,역시 지심을 맨다하니 느낌이 찰싹 감겨온다.
지심맨다 했을 때 지금도 떠오르는 게 논지심 매는 호미다.
밭지심을 매는 호미보다 더 크고, 끝이 뾰죽했으며, 물 속에서 다룬 탓인지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
자루 부분은 나무가 아니라 새끼로 칭칭 감겨 있었지. 그걸로 어떤 지심을 맸던 것일까.
이렇게 말끔하던 논에 피가 잔뜩 올라온 이유는 뭘까?
아무튼, 맨 손으로 논바닥을 훑으며 피를 잡아 뽑는다. 물이 고인 곳에서는.
하지만 물이 완전히 빠진 곳은 한가닥 한가닥 뽑아내야 한다. 게다가 잘 뽑히지도 않는다.
지심들과 씨름하고 있는 사이 휴대폰 뻐꾸기가 두 번 울었다.
그 사이 허리를 예닐곱 번은 편 것 같고, 등줄기가 따가울 만큼 햇볕도 강해졌다.
둘러보니 그래도 지심을 맨 면적이 꽤 된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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