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3. 17:34ㆍ여름지이 또는 신선놀이/여름지기의 노래
지심매기 이틀째.
비가 온 뒤로는 학교앞과 모정에만 나가봤던 까닭에 나머지 논 상태가 궁금했다.
학교앞엔 모터가 돌고, 물사정이 괜찮은 걸 확인하고는 모정을 건너 뛰어 샘골로 갔다.
가운데 논부터 둘러봤다. 제초기를 돌린 다음 어찌 되었나 싶어서다.
대체로 풀이 무성해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기계가 지나가지 않는 곳은 피가 제법 눈에 띈다. 물달개비도 마찬가지로 꽉 쩔어 있다.
참지 못하고 들어서 뽑아낸다.
한 바퀴 휘 돌아 윗배미 첫머리로 오니 상태가 좀 심하다. 아예 '피투성이' 아닌가.
들어서 뽑으려니 제법 저항감이 느껴진다. 그새 많이 자라 줄기가 뻣뻣하다. 어떤 놈은 포기벌기까지 한 상태다.
손을 몇 번 휘젓지 않았는데도 뽑아든 피가 금새 한 움큼이다.
처음엔 논두렁에 던져놓다가, 논두렁이 멀다 싶어지면서는 둘둘 말아 땅 속에서 박아 넣었다.
어제에 이어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을 매던' 싯귀가 자꾸 떠오른다.
당연히 머리에 바른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맞나 싶어진다.
내력 있는 머릿기름 하면 흔히 동백기름 아니던가.
'열라는 콩팥은 아니 열고, 아주까리 동백은 왜 여는가'는 노랫말이 있긴 하지만...
과문한 탓인지, 아주까리 기름을 머리에 바른단 얘기는 듣지 못했다.
아주 어릴 적 배가 아플 때, 어른들이 피마자기름을 먹여주시던 기억이 어슴푸레 하다.
그 맛과 냄새가 그리 좋지 않았던 것까지.
모내기 전, '개고생'하며 맨 손으로 뿌린 그 유박거름의 주성분(70%)이 바로 이 아주까리 깻묵이었다.
그 거북했던 냄새까지 겹쳐 떠오른다. 그걸 머리에?
그리고 흙탕물 튀기는 논에, 땀 뻘뻘 흘리며 지심맬 사람이 웬 머리기름?
아니라면 혹시 몸에 바른 건 아닐까? 이를테면 살갗을 보호하기 위해 올리브유 대용으로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내 기어이 알아내고 말리라.
집에 돌아와 뒤져본 바로는 머릿기름이 맞지 싶다. 60년대까지도 발랐다고.
허리를 펴는 간격이 갈수록 짧아진다.
처음엔 피가 무성한 쪽만 맬 작정이었는데, 몇 가닥만 있는 곳까지 저절로 발길이 간다.
흙 속에서 눌린 발가락 끝이 뻐근해 온다.
물장화 속에 땀이 차서 찌걱이는 느낌까지 든다.
시간이 꽤 흐른 모양이다.
지심매다 쓰러졌다고 나라에서 상줄 일 없으니 노동강도는 알아서 조절해야 한다.
가라앉은 물에 대충 손을 행구고 휴대폰을 꺼낸다. 스마트폰이 아니고 구닥다리 슬라이드폰이다.
그새 뻐꾸기가 세 번 울 시간이 지나가 있다. 오늘 모정논까지 매기는 좀 무리지 싶다.
아, 그리고 물장화 사진... '셀카'라는 걸 찍어 본다.
자귀나무 옆으로 보이는 논바닥은 '피바다'나 '피투성이'라 해도 억울할 게 없어 보인다. 피사리를 마친 오른쪽 논과 견줘보시라.
자전거에 오른다. 예까지 왔으니 지척인 재실논을 그냥치기가 뭐하다.
수로에 물은 꽤 흐르는데 모터펌프가 꺼져 있다. 일단 전원부터 넣고 두 다랭이를 둘러본다.
설마 했는데 그새 물이 쫙 빠져 있다. 다행히 피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펌프를 돌렸으니 물은 곧 찰 것이다.
다시 자전거에 오른다. 백도리 쪽도 들러볼까 했는데 다리가 너무 무겁다. 에이...
말머리를 돌린다. 뚝방길을 따라 털털 거리며 집으로 향한다.
샘골 맨아랫논에 다다르니 갑자기 눈이 훤해 진다.
자귀나무 꽃이 활짝 피어 있다. 그 화려한 색감에서는 무지개가 연상된다.
다시 휴대폰을 꺼내 셔터를 누른다. 그런데 자귀나무만 피사체가 아니다. 저런...
'피바다'를 이룬 논배미까지 눈에 들어온다. 저 노릇을 어이 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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